“인생은 히말라야에 가기 전과 히말라야에 다녀온 후, 둘로 나누어진다.”
어느 유명 산악인의 격언이 아니라 소아과 전문의 김영준(金映峻)씨의 인생철학이 담긴 말이다.
“히말라야에 신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히말라야가 바로 신입니다. 히말라야를 걷는 순간 우리는 신의 품안에서 평안을 얻고 희열을 맛봅니다. 지치도록 걷고,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나의 모순됨을 자각하고 비열한 허물을 벗어던지게 됩니다.”
소아과 전문의 김영준씨가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다소 지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김영준씨 제공
이쯤 되면 히말라야에 수차례 다녀온 전문산악인 수준이다. 그런데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히말라야에 처음 다녀온 초보 의사 산꾼이었다. 단지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 오랫동안 꿈을 꿔오고, 그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책과 인터넷을 통해 수차례 히말라야에 다녀온 게 전부였다.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히말라야가 어떤 곳입니까? 무슨 8000m 급 산을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신분으로 해발 5550m의 칼라파타르에 올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을 보고 왔는데 남다른 감회가 없을 수 없겠지요. 돈오돈수라고 할까요? 단박에 깨달음에 이른 수도승처럼 더 이상 여한이 없는 체험을 하고 온 것이지요. 이제부터의 삶은 바득바득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를 필요가 없어진 느낌입니다. 그저 느끼고 즐기면 그만인 경지에 이른 것이지요. 왜냐 5550m에 올라봤으니까요. 의사 일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책을 백 권을 읽은 대가라 해도 한 번 그 시술을 해본 사람만 못한 것입니다. 해봤다는 것, 올라봤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자신감을 줍니다. 나쁜 쪽으로 가면 건방진 자만이지만, 좋은 쪽으로 가면 흔들림 없는 넉넉함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겁니다. 한번 갔다 오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처음 산을 접한 건 의대 본과 1년 때인 1987년 겨울. 친구 3명과 함께 챙긴 짐이라고는 학생용 색 같은 배낭 한 개에 아이젠도 없이 지리산으로 출발했다. 젊은 혈기에 산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감행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눈발 날리는 지리산을 겨우 올라 이불이나 침낭 하나 없이 산장에서 지내다 산장 주인으로부터 “다시는 산에 얼씬거리지 마라”는 구박을 받으며 걸레 같은 이불하나로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내려와야만 했다. 얼어 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죽을 고생을 하고 아련한 추억만으로 있을 즈음인 2005년 대학서클 선배와 같이 지리산 종주할 기회가 생겼다. ‘찬스는 이 때다’ 싶어 20년 전의 그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바로 등산장비만 50만원어치 장만했다. 이것저것 다 챙긴 배낭은 무게가 20㎏가 넘었다. 첫날 그 배낭을 지고 15시간 동안 23㎞를 걷고 1무1박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이번엔 과거같이 죽을 고생은 아니었지만 생고생을 사서한 것이었다.
요즘엔 거의 매주말 산에 간다. 주중에는 병원에 갇혀 꼼짝달싹 할 수없는 처지라 주말에는 만사 제쳐놓고 산으로 떠난다. 토요일 진료를 끝낸 뒤 오후 3~4시쯤 배낭을 꾸려 떠나는 야간산행도 자주 한다.
이젠 제법 산에 익숙해졌다. 의사로서 산을 즐기는 9가지 방법도 터득했다.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별미를 접하고, 신선이 되고, 산과 선을 보고, 꽃과 나무를 만나고, 세상을 굽어보고, 마음을 다스리고, 산 속을 걷는 방법이다.
산에 다니며 히말라야에 한번 가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병원을 비울 수 없으니 책과 인터넷을 통해 열심히 히말라야를 들락날락 거렸다. 마침내 2009년 8월 2주간의 시간이 났다. 남들은 몬순, 즉 매일 비 내리는 날씨라 걱정했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천금같은 시간이기에 과감히 감행했다. 우기에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어 히말라야의 우기의 모습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욕심도 났다.
마침내 꿈의 히말라야로 향해 출발했다. 15일간의 일정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일정별로 사진과 히말라야에 대한 구체적 정보, 자연의 풍광을 담백한 감상을 담아 책으로 냈다. <히말라야 걷기여행, 평생 꼭 한번 도전하고 싶은 꿈의 길>(팜파스 간)
그는 “걷는 행위란 가장 원시적이고 본질적인 신앙고백”이라고 말한다.
“단지 걸었을 뿐입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좀 더 길게 걸었고, 좀 더 높게 걸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거대한 설산이 있고, 깊은 빙하가 있고, 거침없이 흐르는 강이 있었다는 것. 그것이 히말라야였습니다. 히말라야는 그대로 설산도량이었습니다.”
히말라야의 도사가 다 된 듯한 의사 산꾼 김영준씨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