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부지방의 3000m 이상 되는 산군 중에 일본 최대의 고층습원 오제(후쿠시마와 니가타현 사이)와 삼림욕의 발상지 아카자와(나가노현)를 지척거리에 두고 일본의 3대 온천 중의 하나인 쿠사츠온천을 산행 뒤 바로 즐길 수 있는 산이 군마현의 시라네산이다. 시라네산은 도치기현과 군마현의 경계에 위치한 닛코시라네(日光白根山․2578m)와 구별하기 위해 그냥 시라네산 이라기보다 쿠사츠시라네산(草津白根山)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른다.
쿠사츠시라네산 정상부에 있는 유미이케 호수. 이 호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한다.
쿠사츠시라네산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달라지는 식생과 화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고산식물로도 유명하다. 고산식물과 그들이 피우는 아름다운 꽃은 아쉽게도 9월 이후엔 볼 수가 없다. 쿠사츠시라네산은 10월 말만 되면 언제 눈이 퍼부을지 모르기 때문에 입산을 통제한다. 대신 스키를 즐길 수 있다. 12월부터 시작되는 스키시즌은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된다. 스키 리프트와 케이블카가 총 13대가 산을 오르내린다. 따라서 등산은 보통 5월부터 10월말까지만 개방한다. 이 짧은 시기에 즐기는 등산은 화산지대의 고산식물 진수를 볼 수 있다.
습지엔 나무데크를 깔아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등산로를 만들었다.
쿠사츠시는 위도가 한국의 대구보다는 조금 높고 대전보다는 조금 낮다. 그런데도 10월 하순에 벌써 단풍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고도가 높은 탓도 있지만 지난 여름 너무 무더운 날씨와 가을에 비가 내리지 않아 올해 일본 전국의 단풍은 볼품없다고 했다. 이곳 단풍 절정기는 보통 10월 초순이다.
분화구 주변에 있는 고산식물 코마쿠사. 여름엔 분화구 주변을 뻘겋게 물들일 정도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본은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들여온 지 내년이 꼭 100년이 되며, 1914년 처음 만든 리프트를 기록과 함께 승강장 올라가는 계단에 전시돼 있다.
시라네산에는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유황을 내뿜고 있다. 유황과 이름모를 식생들이 화산지형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줬다.
거울호수.
겨울이면 눈이 3m까지 쌓인다고 한다. 겨울 스키시즌엔 문제없지만 봄에 등산로를 개방하기 위해 그 많은 눈을 치우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란다. 일부 지역엔 7월까지 잔설이 있다. 한창 눈이 쌓일 즈음엔 다테야마에서 유명한 차량의 두 배 높이정도로 눈이 쌓인 길 사이로 차가 다니는 장면은 시라네산에서도 매년 반복된다. 이 때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쿠사츠시 관광과의 마사카주 시라토리씨는 스키점프 일본 국가대표 출신으로 한때 이름을 날렸다고 살짝 귀띔했다. 그는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 ‘국가대표’를 꼭 보고 싶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시라네산 최정상 분화구. 분화구는 세계 최고의 산성호수며, 못을 넣으면 몇일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어 녹아 사라진다고 한다. 바로 그 옆 조그만 호수와 색깔이 바로 비교된다.
분화구(2138m)엔 물도 거의 없다. 무더운 여름날씨에 이어 가을엔 비도 별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단풍이 볼품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젠 분화구를 한바퀴 빙 돌아서 애초 출발지점으로 향했다. 분화구 주변은 전형적인 화산지형인 잔돌과 흙이 섞인 듯한 퍼석퍼석한 땅이다. 여차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우리 철쭉 비슷한 시라네산 고산식물인 석남꽃.
이런 척박한 땅에도 꽃을 피우는 야생화가 있다. 분화구 주변엔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한 잎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다. 그냥 말라죽은 풀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야생화가 7월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코마쿠사’라고 한다. 화산식물의 일종이다. 사진으로 보니 의외로 아름다운 꽃이다. 여름이면 분화구 주변 전체를 붉게 수놓는다. 코마쿠사 뿐만 아니라 하이마츠라 불리는 키 작은 소나무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세찬 바람 때문인지 크게 자라지 못하고 전부 허리 밑으로 누워있다.
등산로 주변 곳곳에 있는 발광이끼.
올라가는 길은 조금 가팔랐지만 길은 잘 정돈돼 있다. 이내 능선 위로 올라서 다시 내려갔다. 대형 주차장과 그 주변으로 시라네산 화산역사자료관, 기념품 가게와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화산 전망대에 가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바로 그 옆엔 ’유미이케(弓池)’라는 호수가 있다. 유미이케는 화산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긴 호수다. 주변엔 나무가 늘어선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산책을 즐기며 고산식물을 감상한다.
시라네산의 고산식물.
식당가에서 ‘유가마(湯釜)’로 불리는 화산 전망대(2160m)까지는 불과 1㎞가 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볍게 화산 분화구를 보기 위해 올라갔다 내려오는 코스였다. 화산 분화구 ‘유가마’에 금방 도착했다. 직경 300m, 수심 30m에 달하는 유가마엔 에메랄드빛을 띤 강산성 물이 가득 차있다. 바로 그 옆 또 다른 새끼 분화구엔 맑은 물이 있어 분화구 두 곳의 물이 확연히 차이 났다. 유가마의 강산성 물은 동물을 빠뜨리면 일주일도 안 돼 뼈조차 원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하게 녹아버린다고 한다. 물론 생물은 전혀 살지 않으며, 세계 제일의 산성호수로 유명하다.
시라네산의 고산식물이 우리 철쭉 색깔과 비슷하다.
이제 하산만 남았다. 일본의 산이 대개 그렇듯이 쿠사츠시라네산은 전형적인 활화산의 모습을 띠고 있다. 활화산은 과거 1만 년 이내에 분화를 했고, 현재 활동 중인 화산을 말한다. 활화산은 일본 전국에 108개 정도 된다. 이 활화산은 과거 화산활동의 정도에 따라 A, B, C등급으로 분류된다. 멀지 않아 분화할 가능성이 있는 A급의 활화산이 일본에서 13개나 된다. 쿠사츠시라네산은 B급에 해당한다고 동행한 니혼마츠 유타카씨가 전했다.
고산식물 석남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2000m 이상 고지를 케이블카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쿠사츠시라네산은 분화구의 다양한 형태를 보며 가벼운 산책을 겸할 수 있는 커지만 아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또 산행 후에는 일본의 3대 온천을 즐길 기대로 부풀게 하는 그런 산이었다.
분화구 주변에 대형 군락을 이뤄 여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코마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