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서 1676년 1월 3일 태어난 기록은 있지만 성장 과정이나 가족 배경 등에 대한 흔적은 거의 없다. 14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며, 결혼도 29세 때 했다. 당시 29세면 거의 손자 볼 나이에 해당한다.
금강전도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전해오지만 사제관계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대작과 졸작, 그리고 다작은 이러한 가능성을 뒤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화풍과 비슷한 화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가짜 그림도 많이 등장하게 된다.
금강산 선유봉
30대 중반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겸재는 40대 들어 첫 벼슬길에 오른다. 화가로서 겸재의 명성이 높아지자 좌의정 김창집의 천거로 종6품의 관상감 천문학겸교수로 관직에 나갔다.
만폭동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생활은 안정되고, 선비 문인으로 편입되는 시기가 40대 였다. 40대에는 <사계산수도> <구학첩> 등의 작품을 그리지만 아직 겸재 특유의 힘찬 화풍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혈망봉
50대 들어서는 왕성한 활동으로 그의 독특한 화풍이 빛을 발한다. 50대 중반 경인 1731년 인왕산 아래로 이사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이루고 화풍도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세 번 기행한다. 50대 후반인 1734년 완성된 <금강전도>를 통해 겸재는 자신이 창안한 진경산수화의 절정을 이룬다. 선비화가로서 그의 역량을 드러낸 작품이며,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백천동
50대 후반 들어 진경산수화라는 중국 화법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화풍으로 새 시대를 연 겸재는 60대부터 그의 전성시대를 활짝 맞는다. 1739년 <청풍계>, 1740년 <경교명승첩>, 1742년 <연강임술첩>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조선 최고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중인 화가들도 점차 정선을 추종하는 시기였다.
초석정
70대 들어서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인왕제색도>를 1751년에 완성한다. 그리고 80세가 넘어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박은순 교수는 “겸재는 학식과 신념을 겸비한 문인으로서 회화는 천기라는 통념에 도전하며, 회화의 성격과 의미, 격조를 한껏 격상시킨 도전적인 화가였다”며 “보수적인 문인들의 비판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진경을 그리기 위해 평생 전국을 답사하고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기 위해 평생 동안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로 노력하는 조선의 대표적 화가였다”고 겸재를 평가했다.
청풍계지각
압구정
연광정
소악루
귀래정
박연폭
삼일포
장안사
낙산사
만폭동
구룡폭
정양사
금강대 사진 겸제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