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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국보’ 석탑 3기… 백제 왕궁은 어디 있나?

백제시대의 유물은 신라시대의 것만큼 찾을 수 없다. 아직 왕궁조차도 발굴하지 못하고 있으며, 유사한 지역 몇 곳을 왕궁으로 추정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패자의 기록은 이렇게 망가지고 부서져 찾을 수 없는 게 역사의 현실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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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가 남긴 석탑 3기 중에 한 곳이다.

현재 백제의 몇 안 되는 유물 중에 석탑이 3기 남아 있다. 그 하나는 부여에 있는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이고, 나머지 둘은 국보 제11호인 익산의 미륵사지 9층 석탑과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5층 석탑이다. 이들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始原)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뿐만 아니라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천하는 과정에 조성된 석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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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에 대한 설명.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1층 탑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승전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네 면에 새겼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뒤 기념으로 탑을 쌓아, 건립연대도 660년쯤 되는 것으로 오인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 결과 이 탑은 백제시대 사찰을 창건할 때 함께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정림사는 백제 왕궁을 수호하는 사찰로 추정되는 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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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탑신 밑, 기단 위 기둥석에 소정방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9층 석탑은 언제인지는 모르나 일부가 무너져 내려 동북쪽 6층만 남아 있었다. 1915년엔 일제가 시멘트로 덕지덕지 보수했다. 탑의 기단평면은 한 변이 12.5m나 되는 정사각형이며, 높이가 14.24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다. 건립연대는 대략 백제 무왕(600~641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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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가장 큰 미륵사지 9층석탑. 현재 해체 복원 중이라 그 옆에 10분의 1 모형으로 만들었다. 그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실제 크기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1997년부터 1998년까지 탑의 구조를 진단한 결과, 석탑 부재의 강도가 약화되고 구조적으로 불안한 점 등이 발견되어 1999년 4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으로 석탑의 원형보전 및 안전관리를 위해 부득이 해제, 수리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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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의 원래 자리. 엄청나게 큰 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미륵사에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석탑이 있었고, 중간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 목탑과 동쪽 석탑은 없어지고 서쪽 석탑만 남아 있다. 해체한 석탑은 지금 한창 복원 중에 있으며, 그 옆에 10분의 1 모형의 석탑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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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있는 왕궁리 5층 석탑.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라는 설이 있다.

왕궁리 5층석탑은 미륵사지 9층 석탑을 본떠 만든 석탑이다. 높이가 9m에 이르며,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국보 제123호인 사리함 같은 사리장엄구가 나와 화제를 모았다. 석탑 주변에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여럿 출토됐다. 따라서 이 탑의 축조시기를 놓고 지금도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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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에 대한 설명.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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