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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백제 왕궁, 익산에도 있었을까?…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왕궁일까, 아닐까? - 마운틴
백제 왕궁, 익산에도 있었을까?…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왕궁일까, 아닐까?


흔히 크게 3시기로 나뉜 백제 700여년의 역사는 한성→웅진→사비시대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B.C 18년에 한성(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건국하며 융성한 한성백제시기. 이 시기는 B.C 18년에서 서기 475년 문주왕까지 500여년에 이른다. 문주왕은 즉위 첫 해 고구려에 밀려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긴다. 바로 이어 웅진백제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는 475년 문주왕에서 538년 성왕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성왕 16년(538)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는 사비백제시대다. 이 시기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뺏길 때인 660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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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동공원에 있는 저수지. 백제 무왕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익산에서도 백제의 왕궁 유적이 발견돼, 익산에서는 백제의 역사가 한성→웅진→사비→익산→사비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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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동공원 저수지 옆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안내돼 있다.

익산에서 발견된 유적은 왕궁리다. 왕궁리 유적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와 1989년부터 현재까지 계속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건립된 왕궁유적과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복합유적으로 확인됐다고 익산시에서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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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이 익산에 왕궁을 건립했다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설명.

실제로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정확한 위치와 왕궁의 규모, 왕궁의 조성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부여에서는 아직 정확한 왕궁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림짐작으로 부소산성 근처 등 몇 군데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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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에 있는 오층석탑.

사적 제408호인 왕궁리유적 입구 안내판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검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중략) 발굴 조사 결과 백제 무왕(재위기간 600~641년)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이다. (중략)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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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있는 무왕이 태어났다는 마룡지와 주변에 있는 서동생가터에 대한 설명.

익산에서는 무왕의 어릴 적 자란 곳인 서동생가터, 즉 마룡지로 찾아 유적지로 등재했다. 뿐만 아니라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추정되는 익산쌍릉을 발견, 무왕시절 백제의 수도가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익산에서는 이 유적지를 ‘익산무왕길’로 연결시켜 전국의 도보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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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있는 마룡지.

반면 부여문화원에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얘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익산에서 주장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기록에서 ‘마룡지는 오금사 남쪽 백여 보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라는 부분은 서동의 어머니가 마룡지 근처에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지 서동이 마룡지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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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 있는 서동요비.

이어 “부여는 성왕 16년(538)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등 6대 123년 동안 국력을 기르고 찬란한 문화예술의 꽃을 피운 곳”이라며 “이 시기의 부여는 일국의 수도로서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요소를 구비한 백제의 심장부였으며, 당시의 성곽을 살펴보더라도 과학적인 축성이면서 왕도 경영에 얼마나 주력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고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땅에 있는 백제의 정확한 역사가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역사학자들이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2 Comments

  1. 이상대

    09.18,2011 at 4:34 오후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익산시 왕궁면 일대를 문화 유적지로 탐방하자   

  2. 사랑해

    09.19,2011 at 9:30 오전

    백제의 수도는 처음에는 서울 그 다음이 차례로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특정지역이 백제지역이었다고 주장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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