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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박태규씨 “난 등산전도사”… 각종 의사산악회 창립 주도


서울시의사산악회․대한의사산악회 등을 창립 주도하고, 서울의대 총동창산악회 창립을 발의한, 한마디로 의사들에게 ‘등산전도사’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지금은 70대 후반을 바라보면서 녹내장을 앓아 등산을 못 다닐 지경이 돼 “등산가고 싶어 죽겠다”고 안달하는 소아과 의사 박태규(76)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박 원장이 어릴 때부터 산에 다녔던 건 아니다. 순전히 힘든(?) 사회생활로 인해 약해진 체력 때문에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1961년, 그는 군의관과 인턴․레지던트를 마치고 국립의료원에 잠시 근무를 했다. 학창 시절엔 축구․농구․배구․탁구․기계체조까지 못 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날렵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대학 졸업 후부터 운동과 담 쌓기 시작했다. 근육은 녹아내리고 지방은 쌓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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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전도사 박태규씨가 도봉산 계곡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71년 강북구에서 소아과의원을 개업했다. 개업과 동시에 병원 운영과 수지를 맞추고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 모든 걸 신경 써야만 했다. 심신은 지쳐갔다. 항상 머리는 무거웠다. 체력이 너무 바닥난 듯해 어느 날 문득 ‘운동을 하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서 줄넘기를 꺼내 뛰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딱 3번을 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날 힘이 없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벅찼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요즘 말로 ‘저질’ 체력에 충격을 크게 받았다. ‘이렇게는 안 된다’ 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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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서울시의산산악회 정기산행에서 회원들이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정상석을 둘러싸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출퇴근을 걸어서 내지는 자전거로 하고, 주말에는 자전거와 등산을 병행하기로 결심했다. 그게 1973년의 일이다. 그때부터 집에서 병원까지 4㎞ 남짓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퇴근했다. 때로는 출퇴근길이 등산코스가 되기도 했다. 북한산 대동문까지 올라가기가 예사였다. 주말이면 동대문에서 출발하는 안내산악회를 따라 전국의 산으로 갔다. 당일과 무박산행 등 어디든 빠지지 않았다. 건강으로 시작한 등산이 어느 덧 등산 그 자체에 흠뻑 빠지게 됐다. 이 만큼 좋은 운동이 어디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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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서울시의사산악회 시산제 및 대한의사산악회 발대식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수십 명의 회원들이 앉아 있다.

그는 ‘이 좋은 등산을 혼자 즐기기 아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위 의사 동료와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동네 의사친구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산행하는 모임인 ‘육봉회’를 조직했다. 여섯 명의 의사라고 해서 이름을 육봉회라고 붙였다. 육봉회는 아직까지 매달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고 있다. 박씨가 조직한 첫 산악회이기도 하다.

건강은 점차 나아졌고, 산행에 더욱 빠져갔다. 중독 중에 가장 좋다는 ‘등산중독자’가 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의사들은 남의 병 고치느라 하루 종일 얽매여 자기 병은 못 고치는데, 돈 안 들이고 자기 병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등산이다’라는 명분을 만들어 전파해 나갔다. 어디든지 쉽게 먹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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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문이자 등산전도사인 박태규씨가 50년 지기인 서울시의사산악회 초대 회장인 이상석씨와 함께 도봉산 계곡에서 대화를 하다 산을 가리키고 있다.

박씨는 육봉회를 조직해 전국의 산에 다니면서 1980년대와 90년대를 보냈다. 1980년대 말부터 서울시의사회 모임에 나가 틈만 나면 의사산악회 창립 문제를 제기했다. 산악회 얘기를 꺼내면 초창기에 먹혀들지 않았다. 의사들 자체가 운동에 관심이 없었고, 운동이라면 골프 정도가 전부일 정도로 알고 있었다.


1988년 서울시의사회 감사로 있을 때 그는 다시 공식 제기했다. 다들 신통찮은 반응이었으나 몇몇 지지파들의 찬성발언으로 건의안에는 채택됐다. 요즘 말로 ‘하, 좋기는 좋은데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직접 해보면 알텐데’에 대한 첫 성공적인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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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한라산 정기산행 갔을 때 회원들이 눈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서울시의사산악회의 창립 첫 산행엔 대절버스 1대가 출발했다. 지금은 보통 5대, 많을 땐 8대 이상이 간다. 약 200명 내외가 참가하는 셈이다. 압구정에서 산행 출발 당일은 수백 명의 의사들로 압구정사거리가 항상 북적인다. 지금은 서울시의사회 회장뿐만 아니라 대한의사회 회장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대한의사회 회장 선거가 있는 해이면 후보자들이 일제히 압구정으로 나와 산행 출발하는 의사들에게 득표활동을 하기도 하고, 일부는 금일봉까지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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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서울시의사산악회에서 일본 북알프스 등산 갔을 때 비구름 사이로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울시의사산악회가 이렇게 커지기까지는 박태규 고문의 역할이 컸지만 다른 사람들의 활동도 무시할 수 없다. 초기 박태규씨와 함께 초대 회장인 이상석씨, 당시 산악회 부회장을 하고 이후 서울시의사회 회장을 지낸 한광수씨, 당시 총무를 맡았던 전행조씨는 이상석 초대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을 맡아 산악회 조직 안착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특히 한광수씨와 전행조씨는 의사회 임원으로 있으면서 물심양면 서울시의사산악회 출범을 도왔다.


여의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회원도 있다. 강미자․조종남씨는 초기부터 여의사들을 이끌고 활발히 산에 쫓아다닌 ‘열성파’이기도 하다. 여성이기 때문에 회장은 못했지만 앞으로 정관을 고쳐 여성도 산악회 회장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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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 갔을 때 의사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산행 가는 날이면 박태규씨의 역할이 단연 돋보였다. 그는 전국의 산 높이와 산의 유래 등에 관해서 흔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항상 산행 가기 전에 월간산에 나온 산에 관한 정보를 머리 속에 완전히 외우고 갔어요. 아침에 나올 때 다시 한번 더 외우고 나올 정도였죠. 산에 관한 모든 정보는 월간산에서 얻었어요”라며 월간산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가 회원들에게 산 높이를 외우는 방법을 전하는 방법은 이렇다.

“지리산은 1915m인데, 한번 구경하고 한 번 더 오세요.”

“한라산은 1950m인데, 한번 구경 오십시오.”

“설악산은 1708m인데, 하나 더하기 일곱은 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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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유럽 몽블랑 원정 갔을 때 회원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2001년 대한의사회산악회 창립은 서울시의사산악회가 주축이 됐다. 서울시의사산악회는 이미 창립돼 있었기 때문에 그 조직을 그대로 가동, 전국의 회원들에게 연락했다. 의사 상호간에 서울과 지방의 교류를 확대하고, 의사들 자신의 건강을 증진시키자는 취지를 그대로 살렸다. 의사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으로 전국의 의사들에게 산행소식을 알리지만 한 번 갈 때는 버스 수십 대가 모일 정도로 성황이다.

요즘 박태규씨는 옛날 등산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며 평지를 걷는 것으로 등산을 대신한다. 등산하면 하산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뎌 내려올 수 없기 때문이다.

“등산도 마음대로 다니고 옛날이 너무 좋았어요. 산에 가면 술을 엄청 마셨죠. 산에 올라가면 정상주, 내려오면 하산주, 2차 가서 노래방, 이후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차수는 계속 늘어갔죠. 술 못 마시면 산악회 임원도 할 수 없었어요. 각자의 배낭에는 술과 안주로 가득했을 정도였죠. 그 때문에 골병 든 의사도 많아요. 다 옛날 이야기죠. 아! 지금 설악산 가고 싶어 죽겠어요. 산에 갈 수 없으니 너무 갑갑해요. 지금 상태로 무턱대고 갈 수도 없고.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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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 피크에서 회원들이 등정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등산 전도사이자 영원한 고문인 박태규씨의 호소다. 그에게 산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혼자만이 아니고 숱한 사람을 산으로 가게 만들고, 지금은 갈 수 없어서, 아니 못 가서 안달일까?

“인자요산(仁者樂山)이고,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하죠. 어진 사람이 산에 오르면 (신)선(仙)이 되고, 산에서 내려오면 속(俗)이 되죠. 따라서 산에 많이 자주 가는 게 신선이 되는 지름길이고, 인사요산이 되는 거죠.”

한자를 풀이하면 사람(人)이 산(山)에 있으면 신선(仙)이 되고, 사람(人)이 골짜기(谷)로 내려오면 속세(俗)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는 신선이 되고 싶어서 산에 간 것일까? 수많은 사람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 그도 이젠 상상 속에서만 신선이 되고 있다.


한쪽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마음속의 산만 오르다 갑갑하면 “아, 산에 가고 싶다”며 스스로 달랜다. 영원한 등산 전도사의 말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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