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엄홍길은 지금 세상의 거봉을 오르고 있다. 그가 히말라야 16좌 완등 후 “이젠 눈에 보이는 히말라야 거봉보다는 세상의 험난한 거봉을 오르겠다”고 선언하면서 엄홍길휴먼재단을 만들었다. 그가 산에 다니면서 아깝게 잃은 동료나 셰르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네팔의 배우지 못한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는 학교를 16개 건립하고, 나아가 어려운 이웃을 지원할 목적으로 재단을 설립했다. 휴먼재단이 순탄하게 운영되고 있지만 과거 히말라야 16좌를 세계 최초로 등정한 만큼 힘든 모양이다. 히말라야 16좌는 힘을 기울인 만큼 오르면 되고 내려오면 성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만 세상의 거봉은 언제 끝이 날지 얼마나 높은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고난의 연속인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으로 등반한 에베레스트의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본격 거봉에 나섰다.
현재 그의 활동은 세상이 다 알고 있지만 과거 그가 어떻게 히말라야를 등정했는지 그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해냈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히마라야 14좌를 완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2년이다. 1988년 88올림픽을 개최 기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거봉이 시작됐다.
1997년 가셔브롬2봉 등정에 성공한 엄홍길.
엄홍길은 88년 첫 8,000m급 거봉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이후 5년여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 벽등반에 몰두했다. 이후 93년부터 본격적으로 거봉 등정 레이스에 나섰다. 그는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3개 거봉을 오르기도 했다. 등반은 역시 세계 제2위봉인 K2와 캉첸중가가 어려운 모양이다.
엄홍길은 안나푸르나에서 중상을 한 번 입었고 5회 도전 끝에야 등정, 이 봉을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이 봉 외에 어려운 봉으로는 역시 K2, 캉첸중가, 마칼루이다.
2007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에 성공한 로체샤르 등정. 당시 만 하루 가까이 연락이 두절돼 실종사고가 난 게 아닌지 모든 사람이 걱정하기도 했다.
엄홍길은 스페인 산악인들과 함께 오른 봉우리가 5개나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거봉 완등 레이스의 중반기인 95년부터 마나슬루,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룸1봉, 안나푸르나를 스페인 바스크팀 대원들과 합동으로 올랐다. 성품이 호방한 그는 스페인의 정열적 산꾼들과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그가 거봉 완등 행보에서 가장 자주 함께 했던 이는 바로 스페인의 거봉 완등자인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로, 5개봉 등정을 그와 함께 이루었다.
로체를 오르고 있는 엄홍길.
엄홍길은 여러 차례 동행했던 스페인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준비성이 우선 철저하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팀웍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까 경량 등반이 되죠. 그러면 전 대원 등정도 가능해지고 말이죠. 될 수 있으면 1차 시도에 등정을 노리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즐기는 스타일이구요.”
동료들과 함께 브로드피크를 오르고 있다.
한국 산악인 중 엄홍길이 가장 자주 동행했던 사람은 박무택, 나관주 두 후배로 각각 4회, 3회 함께 등정을 이루었다. 그 외 그는 민경태, 이인, 모상현, 구은수, 박주훈 등과 한두 번씩 함께 등반했다. 이번 엄홍길휴먼재단에서 산악인유족에게 지원하는 첫 번째 수혜자로 박무택과 나관주 두 후배의 가족이 선정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총 34회 거봉 원정을 나갔고 그중 18회 성공했다.
시샤팡마를 오르고 있는 엄홍길 대장.
셰르파는 고소등반 시 매우 중요한 존재다. 세 사람은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선호하는 셰르파도 달랐다. 엄홍길은 나티와 다와 두 셰르파와 자주 동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등반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
캉첸중가 정상에서.
등반 중에는 대개 대원이나 셰르파들이 지는 만큼 엄홍길 자신도 짐을 지고 움직였고, 길이 막히면 직접 나서서 루트개척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는 별명이 ‘탱크’다. 이 별명은 그의 강한 힘과 더불어 강한 추진력도 상징한다. 그의 이러한 탱크 같은 괴력을 타 대원들이 좇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나푸르나 못지 않게 어려운 것으로 악명높은 K2봉을 그는 의외로 쉽게 등정했다.
K2봉을 등정하면서.
살벌한 빙벽 투성이인 K2.
K2 정상
아무튼 남다른 괴력을 가진 그가 강하게 밀어부치는 방식의 등반을 추구하며 당연히 크고 작은 사고가 여러 번 생겼다. 동료 대원이 하산 도중 실종, 혹은 추락사한 사고가 여러 건 있었고, 그 자신 또한 100여m를 추락, 발목이 뒤틀리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 때 그는 3일간에 걸쳐 이를 악물고 기다시피 하며 베이스캠프로 살아 내려오는 강한 투지를 보였다.
한때 스페인산악팀에 속해 히말라야 거봉 5개를 완등하기도 했다. 이때 엄홍길은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고회상했다.
엄홍길은 96년부터 ‘지’라고 부르는 네팔 문양석 목걸이를 지니고 등반해왔다. 눈(眼) 모양이 드러나는 몽당 연필만한 크기의 이것은 에너지가 생긴다는 의미를 가진 일종의 네팔 부적으로서 값이 매우 비싸다. 그는 목욕할 때도 이것을 걸고 있을 정도로 의미를 주고 있다.
엄홍길의 트레이드마크는 갈색 중절모. 93년 칸텡그리 포베다봉 등정 후 카자흐스탄 매니저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2001년 그것을 잃어버린 후 비슷한 것을 구해 쓰고 다니고 있다.
이런 눈덮인 급경사의 히말라야 거봉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어렵고도 긴 거봉 완등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주위 선후배들의 도움이 없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엄홍길은 자신을 홍보이사로 영입, 안정적으로 가정을 유지하며 원정등반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 파고다아카데미 고인경 회장, 그가 속한 거봉산악회 회장으로서 몇 차례 원정대를 꾸리는 데 앞장서준 동진의 강태선 회장, 이거종 전 KBS 부국장, 트렉스타 이상도 사장 등의 덕을 크게 입었다. 현재 소속인 밀레의 한철호 사장은 네팔에 학교를 건립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항상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등반 중에도 네팔의 티없이 맑은 어린이들에게는 항상 사랑을 베풀었다.
△엄홍길의 등정기록
1988 가을 에베레스트
1993 가을 초오유
1993 가을 시샤팡마
1995 봄 마칼루
1995 여름 브로드피크
1995 가을 로체
1996 봄 다울라기리
1996 가을 마나슬루
1997 여름 가셔브룸 1봉
1997 여름 가셔브룸 2봉
1999 봄 안나푸르나
1999 여름 낭가파르밧
2000 봄 캉첸중가
2000 여름 K2
2007 로체샤르
고봉에는 자외선이 강해 선크림은 필수적으로 바른다.
다음 등반을 위해 기록은 필수적으로 남긴다.
히말라야 등반 당시 입은 동상. 엄홍길 대장의 영광의 상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