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장비 수집가 오기현씨, 1964년 첫 지리산 종주

오기현씨의 산악장비에 대한 욕심은 1963년 고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경남고교에 입학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산악부에 가입했다. 그리고 고교 2년 때인 1964년 경남고 산악부는 첫 지리산 종주원정에 나섰다. 대원사에서 화엄사까지 9박10일 일정이었다. 지금은 2박3일이나 3박4일이면 충분하지만 당시엔 ‘산 넘고 물 건너’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부산에서 대원사까지 가는 데만 꼬박 이틀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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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지리산 첫 종주를 갔을 때 사용했던 움막 속에서 작업하던 장면을 담았다.

1966년 고교를 졸업하고 부산 산악계의 양대 산맥 중의 하나인 자일클럽에 가입했다. 당시 부산 산악계는 1960년 전후 창립된 자일클럽과 대륙산악회가 양분하고 있었다. 고교 때 배우지 못한 산악기술과 장비를 익히기 위해 가입했으나 오히려 그가 3년 동안 갈고 닦았던 실력과 장비보다 못할 정도로 시시하고 부실했다. 더욱이 배울 것도 없다고 판단했다. 1년도 안돼 탈퇴하고 경남고 OB산악회인 ‘구덕산우회’를 중심으로 활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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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현씨가 초기 산악장비인 나무로 만든 피켈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가 산악활동에 매진하는 사이 공부와는 담쌓았다.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산에만 빠져 지내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경남고는 전교생 550여 명 중 서울대에 200명 가까이 입학시키던 지방명문이었다. 언감생심 서울대는 고사하고 서울로도 입학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180㎝ 이상 되는 신장으로 경남고 핸드볼 선수로 활약한 경력이 있어, 서울의 모 사립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부산이 좋아 단번에 거절했다. 우직스런 그의 고집으로 서울행을 포기하고 동아대 체육과로 진학했다. 경남고 졸업이후 대학 진학도, 직장도 가지지 않고 평생 산에만 다닌 걸로 알려져 있던 그에 대한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닌 걸로 판명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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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9박10일 동안 지리산 첫 종주를 갔을 때 군용 A텐트에서 취사하던 장면을 담았다.

1975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다. 서울의 무역회사에서 3년을 근무했다. 이 때 회사 일은 뒷전이고 등산만 열심히 다녔다. 너무 열심히 다녀 허리가 삐끗했다. 첫 객지생활에 대한 외로움을 오로지 산에 다니면서 푼 것이었다. 허리가 삐끗한 정도가 아니라 암벽은 물론 워킹조차 하기 힘든 상태였다. 두 번에 걸쳐 척추수술을 했다.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를 오르고 탐험가가 되려는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크나큰 좌절이었고, 시련이었다.

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0년가량 산을 잊고 지냈다. 산 대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너무 산을 잊고 지낸 탓일까? 산이 시샘한 탓일까? 당뇨병이 발병했다. 고교 동기인 의사가 하는 말이 “많이 걷다가 걷지 않으니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며 “다시 열심히 산에 다니며 걸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 그렇지. 내가 산을 잊고 살았구나.’ 그렇게 다시 산에 빠져들었다. 이번에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산에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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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현씨는 산에 갈 때는 항상 멋쟁이 등산복 차림으로 입는다.

그에 대한 항간의 두 번째 소문인 직장도 한 번 가진 적 없다는 소문은 낭설이었다. 1987년 다시 산에 다닌 뒤로는 직장을 다닌 적이 없다. 그게 정설이다.

“집사람한테 너무 고맙죠. 아마 집사람 아니었으면 그런 생활 못했을 겁니다. 너무 고생 시켜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는 아들․딸 1남1녀의 가장이다. 자식들은 전혀 산을 타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산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도 자식들에게 산에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다. 오씨도 자신의 생활이 정상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좋아서 한 선택이고, 그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산에 그렇게 다녔지만 지리산의 허우천 선생이나 민병태, 설악산의 이경수씨 같이 산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즐겁고 재미있어서 산을 탄 것이지, 다른 고상한 철학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즐겁고 재미있으면 끝까지 합니다. 재미없으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안 하는 게 저의 삶의 철학이라면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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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산악부 활동을 하면서 다녔던 지리산․한라산․천성산에서의 장면을 담았다.

그렇게 오래 산에 다닌 관록으로 동료나 후배들의 배낭을 보면 몇 ㎏가 적정 무게라는 게 바로 나온다. 장비사용도 사사건건 간섭한다. 오지랖이 넓어서라기보다는 동료나 후배에게 장비사용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어서이다. 그도 산을 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일까.

“이젠 체력도 없어서 산에 갈 때 배낭무게도 가급적 줄입니다. 한창 젊었을 때는 배낭무게가 30㎏ 되는 것도 거뜬하게 메고 갔으나 지금은 10㎏만 넘어도 무리가 와요. 모든 걸 후배들에게 물려줄 때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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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현씨가 고교 시절 사용했던 군용 반합을 들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그 많은 산악장비를 가지고 있으면서, 장비만 보면 쓸데없는 부분과 필요한 부분을 바로 지적할 수 있으면서도 아직 그가 만든 장비는 없다. 단지 부품들을 많이 가지고 다닌다. 예를 들면 스토브 수리가 안 되면 그에게 가지고 오는 후배들이 많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장비는 즉시 수리되는 것이다.

바로 그게 궁금했다. 그렇게 산에 많이 다니고,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고쳤으면서도 ‘왜 산악장비공장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안했을까’ 였다. 아마 했으면 한국의 아웃도어산업붐에 편승해서 ‘대박’을 터트렸을지 모를 일이다. 산이 즐겁고 재미있어서 다녔지,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장비를 누구보다 유용하고 실용적으로 고치고 사용할 수 있으면 됐지 상업적으로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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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산행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멋쟁이 차림으로 나서며 산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 있다. 결혼해서 고생만 시킨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여생을 평생 떠받들면서 살아도 모자랄 것만 같다. 그래서 2년여 전부터 장비구입은 그만 뒀다. 반면 아내는 그를 보고 말한다. “당신은 배낭만 메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고.

장비 설명을 마치고 잠시 산행을 하면서 등산복을 갖춘 사진을 찍어야 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배낭에 대한 설명이 바로 나왔다. “이 배낭은 지난해 미국에서 세계 배낭 테스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1위를 한 바로 그 배낭입니다.……”

그는 영원한 산꾼이었고, 진정한 산악장비 수집가였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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