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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벼슬 부름에 20번이나 거절한 ‘명재 윤증’의 고택… 계룡산 끝자락 옥녀탄금형의 명당

계룡산, 조선의 진산(鎭山)이 될 뻔했던 산이다. 계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갖는 의미는 매우 커다. 지금도 어느 정도 고려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집이나 절, 묘터를 볼 때는 반드시 봐야했던 것이 풍수였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도읍지를 보기 위해 무학대사는 계룡산을 보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과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산 이름을 계룡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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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고택은 우리나라에서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옥녀탄금형의 명당에 자리잡은 고택이다. 조용헌씨는 “장군이 나올 지형”이라고 말한다. 사진 RHK(알에이치코리아)출판사 제공

명재 윤증고택과 종학당, 그리고 중악단. 동양학 박사 조용헌씨가 풍수답사 지역으로 정한 3곳이다. 얼핏 봐서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인 것 같다. ‘왜 이 3곳을 정했을까?’ 궁금했다. 조용헌씨는 “집이 가까워서”라고 답했지만 내심은 달랐다.


전남의 장성에서 논산에 이르는 구간은 야트막한 야산 몇 개를 제외하곤 거의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탁 트인 공간이다. 그 강경․논산 들판의 끝자락에 계룡산이 자리 잡고 있다. 명재 윤증고택과 종학당은 야트막한 야산을 배산으로 웅지를 틀고 있고, 조선시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상악(묘향산)․중악(계룡산)․하악(지리산)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악단은 계룡산 끝자락 신원사와 나란히 있다. 풍수적으로 다 연결되는 지맥인 것이다. 크게 그림이 그려졌다. 아하, 그래서 이 3곳을 풍수답사지역으로 잡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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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고택 옆에 수많은 장독이 있다. 이 집에 명재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숙박체험을 하고 이 장독에서 나오는 것으로 업으로 삼고 있다.

산지가 아닌 평평한 들판에서 바라보는 계룡산은 태산교악(泰山喬嶽)의 느낌을 준다. 그 계룡산의 지맥이 논산의 들판 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둥글둥글한 모습의 야산들을 만들어낸다. 명재 윤증고택의 뒷산에 해당하는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노성산(350m)도 둥그런 모양의 야산이다. 노성산 밑으로는 그보다 작은 둥그런 모습의 옥녀봉이 연결되어 있다. 풍수에서 옥녀봉이란 보통 바가지 모양의 조그마한 둥근 봉우리를 말한다. 윤증고택은 이 옥녀봉을 뒷산으로 한다. 앞으로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평평한 언덕들이 자리 잡고 있다.


윤증고택은 흔히들 풍수적으로 옥녀탄금(玉女彈琴)의 명당이라고 한다. 옥녀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말이다. 옥녀가 뒷산의 옥녀봉을 가리킨다면 거문고는 옥녀탄금의 좌측 무릎 위치에 해당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평평한 야산에 해당한다. 풍수에서 좌청룡의 자리는 끝 모습이 평평한 야산이 가로놓여 있으면 옥녀탄금이라고 이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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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고택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용헌씨의 설명을 듣기 위해 모여 있다.

명재 윤증고택은 한국의 전통미를 간직한 한국에 몇 안 되는 고택 중 하나로 꼽힌다. 전통미를 간직한 고택으로 강릉의 선교장과 논산의 윤증고택 정도다. 사랑채 앞에 널찍한 마당이 있다. 거기서 답사 일행이 조용헌씨와 마주보며 일제히 섰다. 사랑채에 걸린 편액에 ‘離隱時舍(이은시사)이라 적혀 있다. ‘세속을 떠나 은둔하면서 천시를 연구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명재의 9대손 윤하중의 호다. 동양과 서양의 역법을 꼼꼼하게 대조한 <성력정수>를 쓴 천문학을 연구한 독특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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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고택의 사랑채에 ‘離隱時舍(이은시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세속을 떠나 은둔하면서 천시를 연구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 집에 거주한 명재라는 인물부터 잠시 살펴보자. 명재 윤증(1629~1714)은 인조 대에 출생하여 효종, 현종, 숙종을 포함한 4대 임금을 두루 거치면서 86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고택의 현판엔 다음과 같이 윤증을 소개하고 있다.


‘숙종 때의 학자로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 선거(宣擧), 장인 권시(權諰),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에게서 배움. 아버지와 함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이조판서, 우의정의 벼슬을 내렸으나 계속 사양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특히 성리학을 전공하여 예학에 밝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그의 고택이 현재까지 보존되는 이유 못지않게 그의 이름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조정의 벼슬 부름에 20번이나 수락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의 벼슬 거부이력은 다음과 같다. 38세에 공조 좌랑, 39세에 세자익위, 40세에 전라도사, 41세에 사헌부 지평, 44세에 사헌부 장령, 45세에 집의, 53세에 성균관 사예, 54세에 경연관, 55세에 장악원정과 호조참의, 57세에 이조참판, 68세에 공조판서와 우참찬, 69세에 제주, 70세에 이조판서, 73세에 좌참판, 74세에 좌찬성, 81세에 우의정, 83세에 판중추부사 등이다.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는 열여덟 번이었고, 판중추부사 사임 상소는 아홉 번이었다. 우의정 자리도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백의 정승’이라는 칭호를 붙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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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고택을 배경으로 조용헌씨의 설명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조용헌씨는 “그의 벼슬 거부이력은 관상에서도 잘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코는 용비(龍鼻․용코)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거다. 풍수적으로 용이 코를 건들면 매우 싫어한다. 이는 결단력이 탁월함을 말하며, 대개 주관이나 신념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사실 명재집안의 벼슬 거부 이력은 그의 둘째 아버지 윤순거(尹舜擧․1696~1668)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순거는 성혼의 외손으로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윤황은 척화죄로 유배되고 숙부 윤전이 강화에서 순절하자 고향에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이러한 상황이 명재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사화나 당론에 얽매이지 않고 고향에서 인재나 키우자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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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택이 옥녀탄금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장군이 나올 명당이라니 참고하시길.

조용헌씨는 “옥녀탄금의 명당에 앞 배경이 높지 않아 명재 고택 자리는 장군 같은 인물이 나올 지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군과 조폭은 가방끈 길이의 차이”라고 농담 삼아 덧붙였다. 좋은 기운을 받아 학문으로 잘 다듬으면 큰 검을 차고 장군이 되어 세상에 나가고, 함부로 휘두르면 회칼을 쥐게 된다는 설명이다. 특히 앞산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너무 높으면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시야보다 조금 낮은 앞산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권대감

    01.20,2013 at 4:52 오후

    南冥 曺植(1501~1572, 1613 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레 증직)은 王의 출 제의를 12번이나 거절하고 落鄕하여 서재(경남 山淸)를 짓고 鄭仁洪(좌의정) 郭再祐(홍의장군) 등 후학들을 길러 壬辰倭亂 때 이들이 3南일대 義兵長으로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적을 세웠어요. ㅡ沙   

권대감 에 응답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