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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C에 ‘무등산’을 이렇게까지 묘사하다니!!!… 탁월한 고경명의 <유서석록>

우리 선조들이 광주 무등산에 오른 기록은 그리 흔치 않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무등산에 올라 남긴 기록인 <遊瑞石錄(이하 유서석록)>은 매우 의미가 깊다. 당시 4800자의 순 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산 문학으로서도 뛰어난 작품이다. 또 유려한 문장으로 무등산과 적벽, 성산(星山)의 승지 등 16세기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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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무등산 정상 서석대 앞에서 등산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은 자는 이순,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이다. 그의 호를 따서 유서석록을 <高霽峰遊瑞石錄>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종 28년 광주의 압보촌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26세 때인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이후 사헌부 지평․홍문관 교리․순창 군수․승문원 판교 등을 거쳐 59세로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내외의 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그 사이 성산의 식영정 등을 무대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여러 작품을 남겼다. 특히 김인후․기대승․정철 등과 사우 관계가 두터웠다고 한다.

만년에는 향리로 물러나 세월을 보내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자 담양의 추성관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장이 되었으며, 태인․전주․여산․은진․연산․진산을 거쳐 금산에서 적과 싸우다 안영․유팽로․그의 아들 고인후 등과 함께 전사했다. 유고집으로 제봉집․제봉속집․제봉유집․유서석록․정기록 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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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봉암에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유서석록은 그의 나이 42세 되던 해(선조 7년, 1574) 4월 20일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초청으로 24일까지 5일간에 걸쳐 무등산인 서석산에 올라 지은 기행문이다. 그는 당시 날짜별로 무등산 곳곳을 등산하고 방문한 기록을 한문으로 상세하게 남겼다.

고경명은 서석산에 오르게 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산이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매달린 듯한 벼랑이나 끊어진 바위 절벽이나 깊은 숲과 그윽한 시냇물 등에 내 신발 흔적과 발자국을 남겨 놓으려 해왔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묘리를 얻지 못했으나, 어찌 나무 하는 시골 아이나 소치는 동자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홀로 가서 마음을 상해서 유의조(柳儀曹, 유종원을 지칭)가 남간에서 느낀 그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산을 자세히 알았다고 말한다면 옳거니와, 산의 정취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아직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뒤를 따라 산에 올라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황홀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회오리 바람의 바퀴와 깃 우산 달린 수레를 타고 낭풍과 현포(곤륜산령에 있으며 신선이 살던 곳) 위에서 노닐게 된 것과 같으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이에 일흥이 비동하여 소매가 떨치고 약속 장소로 향하여, 정오도 채 못 되어 이미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고경명․임훈 등과 함께 당시 동행한 사람으로는 신형․이억인․김성원․정용․박천․이정․안극지 등이었다. 산행 코스는 4월 20일 취백루~증심사. 21일 사인암~증각사~중령~냉천정~입석대~불사의사~염불암~덕산너덜~지공너덜. 22일 상원등~정상삼봉~서석대~삼일암․금탑사~은적사~석문사․금석사․대자사~규봉암~광석대~문수암~풍혈대․장추대~은신대. 23일 영신골~장불천~창랑천~적벽~소쇄원~식영정~환벽당. 그가 날짜별로 무등산을 답사한 한문기행문 유서석록을 <산문기행>(이가서), <山書>(한국산서회), <가사문화권 문화재 소개>(광주북구문화원)을 참고로 해서 정리했다. 이에 한문기행문 유서석록을 3차례에 나눠 싣는다.


4월 20일(갑자) 맑음

갑술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무등산)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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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문학의 산실 중의 한 곳인 독수정을 방문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진산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깊은 숲, 그윽한 시냇물 등 도처에 내 발자취를 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묘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하는 시골 아이나 목동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산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거니와 더구나 산의 정취를 얻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청에 따라 낭풍과 현포위에서 노니는 것과 같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통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흥이 나서 발길을 재촉하니 정오도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누교 위를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하며 바위는 더욱 웅장하게 보여 물소리도 요란하니 차츰 좋은 경치에 이른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바로 말 등에서 내려 저고리를 벗고 시냇가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저 옛날의 창랑가(어부의 노래: 자연대로 맡겨야 함을 노래)를 외우며 소산(중국의 명악가)이 지은 초은의 가락을 읊으니 상쾌한 기운이 살갗에 스며들고 번거롭고 괴로운 마음이 사라져서 그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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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을 한 방문객이 살펴보고 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지팡이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문 앞에 조그마한 다리가 청류에 거쳐 있고, 여기에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니 절경이요, 그 그윽함에 마치 선경에라도 온 양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증심사 스님은 내가 여기 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니, 마중 나온 사람이 있겠는가?

△취백루(翠柏樓)

마침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이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柏樹庭前翠)’라는 글귀에서 따온 듯싶다. 벽 위에 권흥 등 몇 분의 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홍무 년간(1368~1398)에 쓴 것으로 오직 김극기의 현판만 빠졌으니 후세 사람으로서는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증심사 주지 조선스님이 나와서 자리를 쓸고 자리를 펴 주어 나는 피곤하여 잠깐 잠이 들었다. 한식경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노을은 서산에 비치고 안개가 자욱한데 놀란 노루는 대밭에 숨고 새 떼들은 숲속으로 날아들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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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문학을 한 곳에 모아놓은 담양의 가사문학관.

옛사람이 말하기를 “승처상심자애”라 하여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던 말이 수긍이 간다. 조선스님으로부터 약주와 산채로 저녁을 대접 받으며 소재(蘇齋:1515~1590)기 놀러와서 하던 이야기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들을 만했다. 조선스님의 말을 듣고 비로소 누교가 있는 시냇가 바위에 최송암이 쓴 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았으나 새긴 획이 옅고 이끼가 끼어 얼른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었다. 절 옆에 있는 대밭은 산에 이어졌으니 규모가 커서 위천(중국 황하의 지류)의 그 넓은 죽림에도 비길 만하다.

갑이년(명종 9년) 봄에도 내가 이 절에 와 놀았는데, 그 때는 대 마디가 한 자쯤 되게 길고 그 크기가 서까래만큼 커서 이에 비할만한 것이 딴 곳에 없었는데, 지금은 가는 데만 우거진 쓸쓸한 숲이 되어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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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당 앞의 연못.

△증심사(證心寺)

조선스님이 법당을 가리키며 “이 건물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초에 유명한 목수가 지었다는데, 천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기둥과 주춧돌이 기울이지 않고 의젓하게 홀로 남아 있으며, 좌우에 있는 요사는 몇 번을 개축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이 절에 대장경 판본과 여러 가지 불경이 든 상자가 한 전각 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지금은 전각만 남고 경전을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날 저녁에 이만인과 김형이 함께 와서 유숙했다. 노승이 등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예불을 마친 다음 숙소에 와서 공손히 앉아 말하기를 “이 곳에는 옛날에 향반을 설치했다가 연루(연꽃 모양의 물시계)로 갈아 바꾸어 시각에 따라 종을 치기 때문에 시끄러워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까 염려된다”고 하기에 “우리들이야 오랜 만에 속세를 벗어나 잠시나마 이 좋은 곳에 머물며 고요하고 맑은 저녁에 절절로 잠도 잊을 것이요, 또한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아닌데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깊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세 사람이 밤 늦도록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밤은 깊은데 아가 노승의 코 고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아서 더없이 우스웠다.

새벽녘에 남풍이 세게 불어 나는 비가 내리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선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이 산에 오래 살아 구름이나 바람을 예측할 수 있는데, 비록 남풍이긴 하나 비 내릴 징조는 아니라고 했다.

(사흘만 머물면 道를 깨닫는 산… ‘무등산 예찬’ 고경명의 <유서석록>)서 계속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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