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무등산에 올라 4박5일간 산행한 기록인 <遊瑞石錄(이하 유서석록)>을 남겼다. 당시 4800자의 순 한문으로 기술한 유서석록은 기행문으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산 문학으로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유려한 문장으로 무등산과 적벽, 성산(星山)의 승지 등 16세기 무등산과 그 인근 가사문학의 산실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했다.
환벽당에서 문인들이 모여 가사문학을 읊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고경명․임훈 등과 함께 당시 동행한 사람으로는 신형․이억인․김성원․정용․박천․이정․안극지 등이었다. 산행 코스는 4월 20일 취백루~증심사. 21일 사인암~증각사~중령~냉천정~입석대~불사의사~염불암~덕산너덜~지공너덜. 22일 상원등~정상삼봉~서석대~삼일암․금탑사~은적사~석문사․금석사․대자사~규봉암~광석대~문수암~풍혈대․장추대~은신대. 23일 영신골~장불천~창랑천~적벽~소쇄원~식영정~환벽당. 날짜별로 산행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16C에 ‘무등산’을 이렇게까지 묘사하다니!!!… 탁월한 고경명의 <유서석록>),
(사흘만 머물면 道를 깨닫는 산… ‘무등산 예찬’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이어 마지막 기록이다.
담양에 있는 가사문학관의 전경.
4월22일 맑음
△상원등(上元燈)
아침에 판관 안언룡과 찰방 이원정이 먼저 일어나 입석암으로 갔다. 그들은 어제 날이 저물어서 구경을 못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임 선생을 따라 바로 상원등으로 갔다.
△정상삼봉(頂上三峯)
상봉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동쪽이 천왕봉이며, 가운데 것을 비로봉, 그 사이는 백 여척쯤 되며 평지에서 바라보면 대궐을 마주보는 것 같다. 서쪽에 있는 것이 반야봉으로 비로봉과 두 정상의 거리는 무명 베 한필 길이나 되지만 밑은 한자 거리쯤 밖에 되지 않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상 봉우리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와 철쭉이 돌 틈에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있으며, 키는 한자쯤 되는 것이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만 쏠려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서석대의 기묘한 모습. 천연기념물 465호다.
△서석대(瑞石臺)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 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서석대이다. 이날은 안개가 조금 개어 어제에 비하면 맑은 날씨이기는 하나 사방 산들을 멀리는 바라볼 수 없고 가까운 산이나 큰 강은 대개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삼일암과 금탑사
삼일암의 월대에는 입석이 있어서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고 시원스러운 품이 모든 암자 가운데 뛰어나다. 조선 스님의 말에 의하면 사흘만 여기 머물면 도를 깨닫는다는 데서 삼일암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금탑사는 삼일암의 동쪽에 있으며, 수십 척 되는 돌이 하늘을 떠받들고 우뚝우뚝 솟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돌 속에 구급상륜이 감춰져 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독수정 원림의 모습.
△석문사, 금석사, 대자사
석문사는 금탑사의 서쪽 80보 정도에 있으며, 동서에 각각 기이한 바위가 마주서서 마치 문처럼 되어 있고, 이곳 사람들은 여기를 거쳐 출입하게 되어 있다.
금석사는 석문사의 동남쪽에 있다.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고갯마루 흰구름이 산 문을 닫았다’ 한 것은 여기를 두고 말 한 것이리라. 암자 뒤에 기암초석 수십 가닥이 수북하게 높이 서 있고, 그 아래 맑은 돌샘이 솟아 있으며, 불이 매우 차갑다.
대자사의 옛터는 금탑사의 아래에 있고, 여기에도 오래된 샘이 있어, 물이 맑고 찬데 이끼가 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규봉암의 지금 모습.
△규봉암(圭峯庵)
금석사를 지나서 산허리를 감돌아 동쪽으로 나오니 이곳이 규봉으로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바윗돌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라 한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암석의 기묘하고도 오래된 품이 입석과 견줄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하고도 훌륭한 점에서는 입석이 이에 따를 수가 없다. 규봉의 경치는 권극화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생략한다.
△광석대
광석대가 있는 곳은 이 암자의 서쪽으로 그 석면이 깎아지른 듯 넓고 평탄한 것이 격에 맞고 수십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무릇 규봉암의 빼어남이 서석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 으뜸이라면 이 광석대 또한 규봉 10대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니 남쪽에서 제1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눈 덮인 면앙정의 전경.
4월23일 맑음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니 산골짜기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라 고르게 퍼져 줄을 그어놓은 것 같고, 그 위에 솟은 수많은 봉우리는 만경차파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도 같았다. 그 뒤로는 아침햇살을 받은 구름이 붉은 빛깔로 물들어 바람따라 형형색색의 온갖 모양을 이루니 참으로 절묘한 광경이다. 한퇴지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이 때때로 평평하게 어렸네’하는 구절도 이 기묘한 절경을 다 표현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임 선생이 머리에 복건을 쓰고 처마 앞에 나와 앉으며, 이 뛰어난 경치를 찬탄하는 4언절구 한 수를 읊으신다. 그 사이 해는 이미 중천에 뜨고 구름도 차츰 흩어져서 날씨가 활짝 개니 천지가 개벽된 것 같은 참으로 절경이 펼쳐져 있다. 선생의 말씀에 따라 광석대로 자리를 옮겨 일행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이에 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주 한 잔씩을 큰 잔으로 내려 마시게 했다.
부용당 앞의 연못과 전경.
△영신(靈神)골
광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송하대가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산등성이를 타면 영신골인데, 그리로 가는 오솔길이 꼬불꼬불 줄을 그어놓은 것 같아서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 ‘길은 산허리를 감고 삼백굽이를 돌았구나’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장불천(長佛川)
장불천이 흘러 그 아래로 깊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으며, 못가에 나부끼는 산갈대의 은빛이 푸른 소나무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펼쳐놓은 것 같다. 동네 이름을 몽교라고 하는데, 시의 소재로도 쓰일만한 운치가 풍긴다. 시냇물 건너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절벽이 수백 걸음이나 이어져 있어 산수화의 채색병풍을 비스듬히 펴놓은 것 같고, 그 위로 한 가닥 좁은 길이 나있다.
송강정의 풍경.
△창랑천(滄浪川)
창랑이라 함은 옛날 남장보가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이름으로 남령과 장불의 두 천이 합쳐진다. 이곳 장불천은 상류에서 쇠붙이를 씻었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못 가운데는 돌층계가 있다. 큰 고기가 뛰는 모습이 햇빛에 반짝여서 한결 운치를 돋우어 주고, 물고기떼의 그림자가 물속 돌 위에 반사되어 비단구름과도 같은 찬란한 모습이 마치 용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거기에 은어 수십 마리가 발랄하게 뛰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내 비록 고기의 마음은 모르기는 하나 그들이야 말로 얼마나 즐겁겠는가.
△적벽(赤壁)
항아리 모양 같은 옹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돌로 에워싸여 골산을 이루었는데, 봉우리가 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일어섰고 어떤 것은 엎드리기도 하여 형세가 꼭 싸움터에서 군마가 달리다가 잠깐 멈춰 서서 이 절벽이 된 것 같다. 천지조화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장관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높은 곳에 올라 덩굴을 이어 높이를 재어보니 거의 70발이나 됨직하다.
소쇄원 내에 있는 정자.
△소쇄원(瀟灑園)
신시에 소쇄원에 당도했다. 이곳은 양산보가 지은 것이다.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집 동쪽에서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데, 물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 흐른다.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밑 물속에는 큰 돌이 깔여 있는데, 그 바닥이 천연의 절구통이 패어 있다. 이를 조담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인 물이 쏟아져 내려가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처럼 맑고 시원하다.
송강정의 운치있는 모습.
△식영정(息影亭)
해질 무렵에야 식영정에 당도했다. 이곳 식영정은 일행인 강숙(剛叔, 金成遠)이 지은 별장이다. 식영과 서하의 두 액자는 그 모두가 박영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요, 서하는 전자체로 씌어져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 등이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이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 주고 있다.
△환벽당(環碧堂)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듯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가 살던 곳으로 신영천이 환벽당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천연기념물인 충효동 왕버들 모습.
4월24일 맑음
아침에 창평 현령 이효당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一元 李萬仁)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를 돌리니 그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판관(安彦龍)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했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 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의 영봉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었다.
취가정의 전경.
이상으로 서석탐승의 대강을 적어 그 경과와 전말을 끝맺을까 한다. 임 선생을 우르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나 후일에 다시 선생을 모실 기회가 없을지라도 이 기록을 펴봄으로써 선생과 함께 친히 이야기하고 즐기던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6개 성상이 번개 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오르면 그 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 없이 교훈을 준다. 그러나 산에 오르려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서석에서 느낀 감상을 알아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석양에 평상복 짚신 그대로 임 선생 댁을 찾아 작별인사를 드리니 물러나서 여옥(汝玉, 李偵)을 비롯한 친구들과도 헤어져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린 것만 같다.
선조 7년(1574)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 고경명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