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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속살’ 보는 아리랑축제 열려… 한국 3대 아리랑 중 하나

아리랑-. 단연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해외 어느 지역이라도 한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 울려 퍼진다. 아리랑은 민족의 공통언어이며, 한민족의 노래인 것이다. 조선 초기 몰락한 고려 왕조를 잊지 못한 충신들이 은거하면서 고난의 심정을 한시로 읊은 가사가 아리랑 노랫말이 되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남녀의 정한(情恨)을 담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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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축제에서 아랑으로 선발된 규스들이 거리 행렬을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 속 사건의 회한과 아픔을 그대로 녹여낸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이 언제부터 생겼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리랑이 우리 민족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진 가락이고 노랫말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아리랑의 유래나 출발에 대한 논란은 계속된다. 일부에서는 1900년 전후 생성됐다는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마 우리 민족이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곧바로 생긴 노래가 아리랑이 아니냐 하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수천 년 이어온 그 가락은 음악을 좀 한다는 외국인조차 맞추기 힘들지만 한국인은 삼척동자도 어릴 때부터 흥얼거리며 쉽게 장단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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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으로 선발된 규수들이 아랑 영정 앞에서 예를 다하고 있다.

1926년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문화사적으로 일대 사건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흥행을 기록하며, 전국 각지에서 2년 6개월에 걸쳐 상영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신아리랑’은 일명 ‘나운규의 아리랑’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현재 전국적으로 알려진 아리랑은 60여종에 3,600여 가락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지방마다 나름대로의 곡조와 가사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아리랑이 밀양아리랑과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이다. 이들 아리랑을 ‘3대 아리랑’ 또는 ‘3대 전통민요아리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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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 축제에서 사명대사 거리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대체로 구성지고 느린 가락에 생활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노래하는 독창적인 방식인 데 비해, ‘진도아리랑’은 부요(婦謠)적 성격과 육자배기 선율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욕․상소리․한탄․익살 등이 응집되어 부인네들의 야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밀양아리랑은 경쾌함과 긍정적 가락으로 밝고 기대감에 넘치는 가사가 위주를 이룬다. 나중 독립군가가 밀양아리랑 곡조로 불리어졌을 정도다.

그 아리랑이 2012년 12월6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란 제목으로 등재됐다. 중국이 조선족의 아리랑을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선정하고 이어서 유네스코에 등재를 시도하려는 상황에서 이룬 쾌거였다. 유네스코에 등재될 당시 서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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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기간 중 밀양시내는 온통 축제분위기에 들썩인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은 역사적으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일반 민중이 공동 노력으로 창조한 결과물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여음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해온 두 줄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 보편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한편, 지극히 단순한 곡조와 사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흥적인 편곡과 모방이 가능하고, 함께 부르기가 쉽고, 여러 음악 장르에 자연스레 수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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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의 공적비가 사명대사 표충각에 세워져 있다. 이 공적비는 국난을 당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국난비라고도 한다.

‘아리랑’을 갖고 있는 도시에서는 아리랑 마케팅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밀양시에서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계기로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아리랑축제는 1957년부터 이미 열고 있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보물 제147호 영남루 대중수를 계기로 밀양종합문화제를 개최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10년 뒤 1967년에는 밀양문화제가 너무 일반적이라는 평가와 향토적인 이미지와 정서적인 특징을 주지 못 한다는 여론에 따라 아랑제와 합쳐서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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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각에는 사명대사 영정과 서산대사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바로 그 옆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도 나란히 걸려 있다.

올해도 예외 없이 밀양강 둔치 및 밀양 일원에서 5월2~5일까지 4일간 열린다. 아리랑축제는 아랑의 기일(기일)인 음력 4월16일을 기해 사람들이 많이 모일만한 날짜에 맞춰 개최된다.

밀양아리랑축제의 유래가 되는 아랑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갖고 있다.

‘옛날 밀양부사에게 아랑(阿娘)이라는 딸이 있었다. 자태가 곱고 인덕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사모했다. 그 때 관아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아랑을 본 뒤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랑의 침모(針母)로 하여금 아랑을 유인하도록 했다. 아랑은 침모의 권유로 달 구경을 가서 한참 달을 보고 있는데, 침모는 간데 없고 젊은 사나이가 간곡히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랑은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 없이 사나이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당황한 사나이는 연정이 증오로 변하여 비수로 아랑을 살해하고 숲 속에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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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선생의 동상과 공적비.

아랑의 시체는 지금 밀양강 옆 영남루와 아랑각 사이에 발견됐다고 전한다. 지금 구전되는 ‘밀양아리랑’은 그 때 밀양의 부녀들이 아랑의 정절을 사모하여 ‘아랑, 아랑’하고 불렀던 것이 오늘날의 민요 아리랑으로 발전했다는 설이다.

죽음으로서 순결의 화신이 된 아랑 낭자의 ‘정순(貞純)정신’은 밀양아리랑축제의 3대 정신 중의 하나다. 다른 둘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사명당 임유정 선사의 ‘충의(忠義)정신’,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이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지덕(知德)정신’이다. 충의․지덕․정순이 밀양아리랑축제의 핵심정신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밀양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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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예림서원 입구.

사명당이 누구인가? 구국의 의병장이자 뛰어난 선승(禪僧) 아닌가. 임진왜란 때 그의 활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노원평 전투와 사명당이 이끄는 승군과 관군 3,000여명으로 왜군을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왜군 5만 명은 한양에 집결한 뒤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양주로 군사 일부를 보냈다. 이때 사명당은 매복 작전으로 그들을 섬멸했다. 이 노원평 전투는 왜군이 한양을 물러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에서 성과에 이어 일본과 4차례의 강화회담에서 그의 역할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일본에 파견되어 협상한 끝에 3,000여명의 백성을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표충비는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한다.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 비(碑)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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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루를 들어서면 예림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김종직은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로 꼽히며,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됐다. 문하생으로 정여창․김굉필․김일손․유호인․남효온 등이 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도학정치를 펼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며, 훈구파 세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쓴 조의제문을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넣은 것을 훈구파의 거물인 이극돈이 발견하면서 같은 훈구파 세력이 주도한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의 발단이 됐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글이었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의 문집이 소각됐을 뿐 아니라 많은 제자들과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했다. 사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신원이 회복되고 숙종 때는 영의정에 추증됐다.

밀양아리랑축제 기간 중에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제사도 올린다. 축제의 기본은 향토문화를 살리며 무형자산인 아리랑을 축제로 여하히 승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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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 축제 기간 중 아랑 규수를 선발한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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