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제통문(羅濟通門)’은 구천동 33경 중에 제1경이다. 한 때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라 하여 교과서에까지 실린 적이 있다.
무풍면과 설천면 사이의 석모산의 바위를 뚫어 만든 굴문인 라제통문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다. 무주군은 오랫동안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인 적천현과 신라땅인 무산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로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땅을 가르는 경계였다.
무주 구천동 33경 중의 제1경인 라제통문. 무풍면과 설천면을 가르는 라제통문은 같은 행정구역이면서 서로 다른 풍습과 말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경사도와 전라도로 오랜 세월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군 안에서도 풍습과 문물이 다르고 말씨마저 서로 달랐다. 지금도 설천 장날에 가면 사투리만으로도 무주와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무풍면 사람들은 큰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갈 때 주변의 거창이나 대구로 향하지만 설천면 사람들은 무주읍이나 대전으로 일을 보러 간다고 한다.
무주 라제통문 앞에 가면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통일문으로도 불리는 라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에서 무풍면으로 가는 도중 설천면 두길리 신두마을과 소천리 이남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암벽을 뚫은 통문을 말한다. 무주읍에서 동쪽 19㎞의 설천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위치하여 두 나라가 국경 병참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의 동서문화가 교류하던 관문이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지금도 언어와 풍습 등 특색을 간직하고 있어, 설천장날에 가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와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
반대편에서 본 라제통문.
그러나 이 문이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일제시대 때 뚫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굴의 원래 이름은 기미니굴. 1910년경 일본 사람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신속히 옮겨가기 위해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 기미니굴을 중심으로 위쪽마을은 ‘기미니마을’로, 아래쪽은 ‘이미리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라제통문 안내판.
이 굴의 명칭이 바뀐 것은 1963년 무주 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기미니굴’이 아니라 ‘라제통문’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등장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필수코스로 자리 잡게 됐다고 한다. 무주군의 행정기록을 적어놓은 무주 군청지인 ‘적성지’에는 당시 공사를 한 작업일지가 적혀 있다고 한다. 한 역사단체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문제를 제기해 교과서에서 빠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어쩐지 라제통문을 지나칠 때마다 라제통문이란 비석이 어찌 좀 지나치게 새 것이고, 동굴자체도 그리 오래된 것같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접하고 보니, 어이가 없어진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1963년 이전의 상황을 모르고 지금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었고, 삼국시대 때 뚫은 동굴로 분명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역으로 무주군에서는 1963년 이 동굴문을 라제통문이라 붙이고 역사적 사실을 스토리텔링 한 그 창의적 인물에게는 대단히 감사해야 하지 아닐까 싶다.
번역도우미
06.01,2014 at 5: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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