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산을 대하는 태도와 의미는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애초에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원형적 구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이를 신시(神市)라고 불렀다’라고 전한다. 산과 숲과 도시의 원형적 구조가 그대로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의 산과 숲과 도시에 인간이 내려와 사는 모습이다.
김수로에 이르러서는 경관적 측면이 고려된다. ‘이 땅이 빼어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이 머물 땅도 될 만하거든…’ 이라며 도읍을 정한다. 경관적 측면은 형상적 측면으로 곧장 연결된다. 형상적 측면은 ‘오래 살만한 땅인가’라는 입지조건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이는 10세기 후삼국의 풍수사상에 그대로 이어진다. 궁예와 왕건은 산수를 두루 둘러보고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 기록은 풍수도참설이 나라의 수도 선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도선은 왕건의 도읍지 선정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른바 자생풍수인 도선의 비보풍수가 한반도에서 창시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따라서 한민족에게 산에 대한 인식과 의식구조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원형적 구조에서 경관적 측면으로 넘어가더니 이내 ‘오래 살만한 땅인지’ 가늠의 기초가 되는 초기 풍수의 형태를 띤 형상적으로 바뀐다. 형상적 구조는 풍수의 밑바탕이 되면서 이 땅에 풍수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는 지리사상의 흐름과도 무관치 않다.
풍수는 직관적이면서 종합적이다. 입지조건을 따질 때 산 규모도 보고, 경관도 보고, 접근성도 총체적으로 고려한다. 직관은 이론적 기반이 부실할 수 있다. 이를 도선이 과학적, 논리적으로 보충해서 내놓은 게 바로 비보풍수다.
최원석 경상대 교수는 일제와 같은 역사의 단절은 우리 지리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산에 대한 의식과 관념은 국가는 바뀌어도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풍수는 대부분 산천사상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제 들어 단절이 되고, 그 이후 서구학문이 들어오면서 우리 것보다는 외국학문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환경이란 개념이 대표적이죠. 환경은 풍수와 대체되는 개념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풍수가 좋다’라고 했지만 지금은 ‘환경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 백두대간이나 정간 등의 개념은 사라지고 산맥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의 산에 대한 인식과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산은 종교와도 융화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도교는 원래 무위자연사상이니 산과 관련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교까지 산과 상당한 관련성을 맺는다. 이는 유교권에서는 거의 유일하다. 불교는 당시 주류였던 선종이 산과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사찰을 산문(山門)이라 하고, 사찰에 들어가는 것을 개산(開山)이라고 할 정도로 선종과 산을 동일시했다. 하긴 선종의 선(仙)은 글자 자체가 산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한국은 산악불교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유교는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주희는 중국 무이산 계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실 초기 유교는 당시 불교가 워낙 왕실불교로서 자리 잡아,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의 성리학이 고려 말 본질을 벗어난 불교의 대체 학문과 종교로 급속히 퍼지게 된다. 특히 조선 중․후기 들어 정치적 탄압을 받거나 당쟁에 환멸을 느낀 선비들이 여기저기 정자를 짓고 구곡을 만들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풍조가 생겼다. 율곡의 석담구곡, 우암의 화양구곡 등이 대표적이다.
최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였다.
“한민족의 의식 구조를 피라미드로 표현하면 제일 상층부에는 유교, 바로 그 밑에 불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밑 상당히 넓은 저변에 선(仙)이 깔려 있습니다. 샤머니즘이나 무속의 형태라 볼 수 있죠. 우리 민족 고유의 태백산, 마니산에 있는 신앙 같은 것입니다. 깊은 에너지의 지층 흔적이 보이고 느껴집니다. 산악신앙이 그 중에 대표적입니다. 단군이나 산신 할머니 같은 형태죠. 산신 신앙이 우리의 뿌리입니다. 마을마다 어디에나 있습니다. 불교의 절에도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산신각이 있습니다. 산신각이 사실 절을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대표적 신은 산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민족의 탄생설화부터 대표적 신(神)까지 산과 관련 있는 상태에서, ‘산천DNA’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한민족의 정체성이 곧 산이다’라고까지 설명이 가능하다. 한민족에겐 애초에는 ‘하늘이 곧 산’이었고, 이어 ‘천산에서 용산으로’ 변화되고, 중세 들어서부터 ‘인간과 산의 조화’라는 식으로 산의 인간화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우리의 산은 사람의 산입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깃들여 살면서 산은 인간화 됐습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산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산의 역사, 산의 문화가 독특하게 빚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산, 생태의 산보다는 역사의 산, 문화의 산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한 겁니다. 산과 사람의 융화와 교섭은 오랫동안 국토의 전역에서 이뤄졌습니다. 사람은 산을 닮고, 산은 사람을 닮아 한 몸이 된 겁니다.”
우리의 산과 한민족의 관련성에 대해서 최 교수가 현재까지 내린 결론이다. 최 교수는 책에서 우리 민족이 산을 좋아하는 인문학적 이유를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건 아니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는 한국에 왜 등산객이 많은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 언젠가 심리학자와 관련 학자들이 한국인의 산천DNA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하면 분명 상관관계가 명확히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우리가 왜 산에 대해서 연구를 소홀히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산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는 山연구소를 만들어 한민족의 정체성을 본격 연구해볼 계획입니다. 산을 빼고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논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