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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백두대간 지명 이야기… 성삼재·정령치·팔랑치·여원재의 유래는? - 마운틴
백두대간 지명 이야기… 성삼재·정령치·팔랑치·여원재의 유래는?

지리산 성삼재는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로,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많이 사용한다. 지금은 861번 지방도로가 뚫려 사람들이 차를 이용해서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이전에는 힘겹게 올라가던 고개였다. 해발 1,102m이니 웬만한 산을 오르는 수준 이상이다. 이 높은 고개가 삼한시대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흔적은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명을 따라 그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그 역사가 곧 지리산의 역사인 것이다.

성삼재는 ‘3개의 고개(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진한군에 쫓기던 마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다.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했다고 해서 황령재, 남쪽은 성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고 해서 성삼재(姓三峙)라 했다고 전한다.

국립공원사진공모전에서 수상한 지리산 사진. 아름다운 능선이 구름과 어울려 넓게 펼쳐져 있다.

국립공원사진공모전에서 수상한 지리산 사진. 아름다운 능선이 구름과 어울려 넓게 펼쳐져 있다.

노고단에서 성삼재에 도착하기 직전 성삼재에서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는 사람은 임도를 따라 가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화엄사계곡에서 올라가는 등산객들은 그 가파른 등산로 때문에 시작부터 입에 단내가 날 정도다. 계곡 위로 올라서면 백두대간 코재에 도착한다. 화엄사에서 코재까지 줄잡아 4시간 정도는 소요된다. 이 코스는 경사가 워낙 급해서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이어 종석대가 나온다. 성삼재의 남쪽이자 코재의 서쪽에 올라있는 봉우리다. 정상부가 암릉인데, ‘엎어놓은 종처럼 오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성삼재에 도착하면 확 트인 전망 때문에 등산객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도 눈에 많이 띈다. 팔랑재와 황령재, 반야봉 등을 바라볼 수 있고, 구례의 지리산온천이 눈 아래 내려다보인다.

지리산 서북능선에 있는 만복대 정상 봉우리와 돌탑.

지리산 서북능선에 있는 만복대 정상 봉우리와 돌탑.

팔랑재(혹은 팔랑치)는 조선시대에는 항상 국가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했지만 남해로부터 침입해오는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다. 팔랑재에서 여원재까지 산성 만해도 상당했다고 전한다. 달의 경관이 좋은 인월(引月)에서 보면 팔랑치는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져 있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마한이 도성을 쌓은 곳이 달궁이고, 이 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다. 그 능선에 남은 억새들만 자취를 대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27년 마한 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기 9년의 일이다. 같은 <삼국사기>에서 온조왕 34년 마한의 장수 주근을 토벌했다는 기록과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시차는 조금씩 있지만 서기 100년 전에 마한은 역사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성삼재에서 지방도 861번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는 코스가 만복대 능선이다. 그것이 바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출발지점이기도 한 곳이다. 성삼재에서 작은 고리봉을 거쳐 묘봉치~만복대를 지나 정령치까지는 8㎞에 이른다.

만복대 정상에서 지리산 성삼재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만복대 정상에서 지리산 성삼재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만복대 능선은 기본적으로 마한의 토성으로 전한다. 지금도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 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조각이 고려시대 양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달궁마을이나 주변에서는 ‘마한 장군상’으로 부른다.

능선 첫 봉우리는 ‘작은 고리봉(1,248m)’이다. 만복대 능선에는 고리봉이 두 개 있다.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중간지점 쯤 백두대간 마루금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로 꺾이는 능선이 있다. 바로 그 능선이 고리봉이다. 성삼재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 돼 나오는 고리봉은 ‘작은 고리봉’으로 불러, 고리봉과 구별한다.

고리봉은 섬진강에서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그 높은 곳에 무슨 배를 묶은 고리가 있었을까 의아해하지만, 아무튼 현재까지 전하는 얘기다.

고리봉은 마한 당시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달궁마을 뿐 아니라 인근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해 모셔왔다고 전한다. 수일 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제물은 대추, 밤, 곶감 등 삼실과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은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했다고 한다.

고리봉 정상 비석.

고리봉 정상 비석.

이어 묘봉치(1,108m)가 나온다. 만복대와 작은고리봉 사이 고갯길이다. 묘소가 있는 봉우리라고 해서 묘봉치라고 부른다. 마루금은 이후부터 계속 치고 오른다. 만복대(1,433.4m)가 그 정점에 있다.

만복대(萬福臺)는 풍수지리적으로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마루금은 다시 내려간다. 정령치(鄭嶺峙․1,172m)에서 한숨 돌리듯 잠시 쉬어간다. 다시 고갯길이다. 한국에서 차가 다닐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인 만항재(1,330m) 다음으로 높은 곳으로 꼽힐 정도다. 정령치는 황령치와 함께 마한의 궁성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나 고갯길이 매우 넓어 주차장도 함께 마련돼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따.

지리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따.

정령치에서 능선은 가파른 경사길로 이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뚝 솟은 봉우리, 고리봉이 나온다. 이 봉우리가 백두대간의 분기점이 된다. 백두대간은 서쪽 고기리 마을 방향으로 뚝 떨어지고, 지리산 서북능선은 바래봉까지 계속된다.

백두대간은 마루금은 사라지고 마을로 연결된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인 노치마을(일명 가재마을)이 곧이어 나온다. 갈대 노(蘆)자와 언덕 치(峙)자를 쓰는 이 마을은 원래 갈대가 많아서 갈대마을로 불렸다고도 한다.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에 위치해 한 집안에서도 행정구역이 갈리는 곳이다. 그래서 주천에서 밥을 지어 운봉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우스개 말이 있을 정도다. 물 역시 한 마을에서 낙동강과 섬진강으로 나뉜다. 이 마을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으며, 물맛 좋기로 소문난 노치샘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스님들이 판 것으로 여긴다. 6․25가 터지고 장티푸스가 돌 때도 이 샘물을 마신 사람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 마을을 지나는 백두대간 종주꾼들은 한 해에만 수 천여 명 달한다. 노치마을의 당산 소나무에 인사하지 않은 사람, 노치샘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백두대간을 지났다고 할 수 없다는 얘기도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

백두대간 마루금

백두대간 마루금은 이제 지리산권을 완전히 벗어나 비교적 완만한 코스로 이어진다. 다시 능선이 시작되는 봉우리가 수정봉(804m)이다. 수정봉은 여원재와 주촌리 사이에 가장 높은 봉우리다. 이어 입망치와 여원재로 마루금이 연결된다. 여원재는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한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 되고, 섬진지류는 남원시가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져 나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왜구의 손길이 거쳐 간 자신의 왼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는 고갯마루 주막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결한 여인의 원혼은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 등지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일러주었다고 전한다. 왜장 아지발도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한다. 또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도 부른다. 여원재 남원쪽 고갯마루의 암벽에는 왼쪽 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있다고 한다. 이는 전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강병규

    06.26,2015 at 6:54 오후

    지리산의 깊은 이야기들이 흥미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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