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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국군의 날이 왜 10월1일 일까?… 38선 따라 오르내리는 ‘38선숨길’ 걸어 - 마운틴
국군의 날이 왜 10월1일 일까?… 38선 따라 오르내리는 ‘38선숨길’ 걸어

10월1일은 국군의 날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왜 하필 10월1일이 국군의 날일까? 10월1일이 어떤 날이며, 무슨 의미로 국군의 날로 지정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아는 사람은 ‘그것도 모르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 양국은 좌우진영의 극심한 대립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한반도에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하는데 전격 합의한다. 한민족은 뜻하지 않은 분할로 남북분단의 비극을 맞게 된다. 이어 1950년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남한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다. 맥아더 사령관과 국군은 북으로 계속 진격할 것을 주장하지만 유엔군은 38선을 넘지말 것으로 지시한다. 38선을 앞두고 국군과 유엔군은 잠시 머뭇거린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명령이 나오자마자 국군 3사단 23연대가 최초로 38선을 넘어 통일의 꿈을 안고 북으로 진격한다. 그 날이 바로 10월1일이다. 현재 국군의 날은 정부가 이날을 기려 1956년 제정했다.

38선휴게소에 38선을 알리는 이정표와 38선숨길 출발지점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38선휴게소에 38선을 알리는 이정표와 38선숨길 출발지점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3사단 23연대는 당시 양양에 주둔해 있었고, 양양은 처음으로 38선 이북을 뚫은 지역인 것이다. 매년 양양시내에서 38선 돌파 재현기념행사를 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8선이 그어진 당시 양양에서는 웃지 못 할 비극이 숱하게 생겼다. 같이 살던 마을이 한 순간에 남북으로 나뉘고, 다니던 학교도 순식간에 남북으로 나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 눈치를 보며 목숨 걸고, 학교에 가기 위해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 낮과 밤을 뒤바꿔가며 남과 북을 오갔다. 38선이 지나는 양양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 아픈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양양은 그 비극적인 과거를 다시 살려내 평화를 되새기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38선을 따라 걷는 길을 만들었다. 그게 ‘38선숨길’이다. ‘숨’의 의미는 몸을 감추기 위해 숨어다닌 길과 호흡과 소통하는 의미를 담은 남과 북이 소통하기를 바라는 중의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38선휴게소에서 지하보도를 지나 38선 잔교리마을, 일명 평화마을로 접어든다.

38선휴게소에서 지하보도를 지나 38선 잔교리마을, 일명 평화마을로 접어든다.

38선숨길은 7번국도 38선휴게소에서 출발해서 잔교리 평화마을~대치리~명지리~38선전망대를 거쳐 한천산 옆 자락을 지난 뒤 부소치리 고개~도리 한국의학박물관 옆 남천학생체험학습장까지 총 16.8㎞에 이르는 길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는 38선 휴게소는 7번국도 바로 옆 해변에 있다. 38선을 가리키는 커다란 비석과 함께 북진하는 탱크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조성한 38선 미니주제체험관에 6․25 당시의 역사와 생활상을 간단히 보여주고 있다. 북쪽 해변으로는 양양의 명소 하조대가 저만치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공신 하륜과 조준이 해안의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그 사이로 자라는 노송의 절경에 반해 은거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명승 제68호. 멀리서 봐도 운치 있는 분위기다.

평화마을엔 각종 무기 조형물로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평화마을엔 각종 무기 조형물로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지하보도로 7번국도를 가로지르면 바로 잔교리마을로 연결된다. 일명 ‘평화마을’로 불린다. 잔교천을 따라 700m구간에 마을 공공미술사업으로 6․25전쟁관련 민족적 애환과 지역정체성을 담은 벽화 및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지하보도부터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시작으로 그물 속에 갇힌 포탄, 남북이 평화를 낚는 조형물, 철로를 잘라 만든 평화의 탑 등이 눈길을 끈다. 평화 상징물인 비둘기와 이를 배달하는 우체부의 모습도 한편에 있다.

잔교리마을은 38선 비극을 현장에서 체험한 전형적인 마을이다. 조형물이 설치된 잔교천이 바로 38선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같이 살던 이웃이 졸지에 남북으로 나뉘어 방문할 수 없는 현실로 바뀐 것이다. 잔교리는 이름 그대로 마을 중간에 하천이 흐르고 있어 하천을 건너기 위한 잔교(棧橋)가 많아 이름 붙여졌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우체통 위에 앉아 평화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우체통 위에 앉아 평화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잔교천이 절묘하게 마을을 가로지른다. 양쪽으로는 황금들녘으로 변신한 벼들이 고개를 숙이며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 어귀엔 장승들이 평화롭게 방문객을 맞는 듯하고 코스모스도 가을을 알리고 있다. 위도 38도를 알리는 이정표도 가끔 나온다.

잔교를 건너 38선 이북으로 넘었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도, 어느 누가 제지도 않는다. 하지만 당시엔 군통제소가 있어 서로 전혀 방문할 수 없었다. 38선이 확정된 1945년 잔교리에 살던 18세 홍 모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낮에는 잔교리 마을에 지내다가 밤이 되거나 교전이 생기면 잔교리 앞산 범부골로 피난했다. 땅을 파고 나무 가지를 얹은 움막형태의 임시가옥을 짓고 생활했다.”

당시엔 좌익과 우익 모두 자기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모둠’이란 단합대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모둠이 끝나면 좌익은 우익을 습격하고 우익은 좌익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서로의 모둠을 방해하려고 단합대회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잔교리는 마을 단위에서 가장 많은 27명의 경찰을 배출, 그나마 좌익들의 습격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양양군 문화관광해설사 김기수씨가 철로로 만든 평화의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양군 문화관광해설사 김기수씨가 철로로 만든 평화의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역사적 현장을 지금 걷고 있다. 시간은 흘러 과거를 볼 순 없지만 그 사건의 현장은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듯하다.

황금들녘은 가을을 알리고 있다. 길 옆 잡초와 나무들은 녹음의 절정을 지나 농익은 듯한 분위기다. 마치 곧 터트릴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에 향기를 내뿜던 꽃들이 이젠 잇달아 열매를 맺고 있다. 마을 농가에서는 대추, 밤, 감, 배나무에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도로에서 출발한 38선숨길은 마을길을 거쳐 살짝 산길로 접어든다. 널찍한 임도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임도를 지나 다시 마을길로 내려간다. 대치리라고 쓰인 비석이 저 앞에 있다.

대치리(大峙里)는 풀이하면 큰 고개가 있는 마을이다. 동으로 임재, 서로는 희묵재, 남으로 직시재, 북으로 귀골재가 있어, 큰 고개, 즉 한재라고도 불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다.

벼들이 잘 익은 황금들녘 사이를 걷고 있다.

벼들이 잘 익은 황금들녘 사이를 걷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 명지리 방향으로 튼다. 아늑한 마을의 황금들녘에 고개 숙인 벼들이 넘실거린다. 논두렁에는 커다란 호박이 덩굴째 뒹굴고 있다. 마을 입구에 살짝 들르고 다시 임도로 들어간다. 완만한 경사로 걷기에 딱 좋다. 길 옆 무성한 나무는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이제 초록의 잔치를 끝내고 곧 단풍소식을 전할 분위기다.

초록이 절정에 오른 임도 38선숨길을 걷고 있다.

초록이 절정에 오른 임도 38선숨길을 걷고 있다.

초록의 향연을 즐긴 발걸음은 어느 덧 명지리로 들어선다. 명지리는 옛날 마을 한가운데 작은 못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은데도 물이 맑아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도 해서 ‘明池里’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명지리안골은 분단 당시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38선 이북동포들의 길의 최종점이자 남한의 시작점이다. 명지리 경계에 국군지서가 있다. 명지리안골은 디모테오순례길의 시종점이기도 한 곳이다. 디모테오순례길은 분단 이후 북녘에 남은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당시 그가 다녔던 길을 재현해서 만들었다. 이광재 신부는 38선이 인접한 양양성당의 주임 신부로 북한에서 피난 오는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을 남한으로의 이주를 도와주다 좌익에 죽임을 당했다. 이 얼마나 슬픈 과거인가. 이 길은 눈 덮힌 경치가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38선을 나타내는 안내물이 길 군데군데 자주 나온다.

38선을 나타내는 안내물이 길 군데군데 자주 나온다.

명지마을은 일명 앵두마을로 불린다. 마을에서 앵두를 특화작물로 가꿔서 축제도 열고 판매도 한다. 양양은 송이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명지리송이는 특상품으로 알아준다. 마을 어귀엔 입구를 알리는 솟대와 함께 커다란 송이 조형물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꼭 남근같이 생겨 멀리서 보면 남근마을을 알리는 상징물 같이 착각하기 쉽겠다.

혹시 송이의 은은한 냄새가 나는지 깊은 호흡으로 들이켜 본다. 아직 냄새는 나지 않는다. 하긴 솔숲으로 들어가야 송이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임도로 올라간다. 한천산 자락이다. 조금은 경사가 있다. 이곳이 바로 남한 송이의 대표산지다. 길 이름도 명지리에서 ‘송이로’로 바뀌었다.

송이마을에 송이 조형물이 마치 남근같이 세워져 있다.

송이마을에 송이 조형물이 마치 남근같이 세워져 있다.

한천산 송이산지를 지난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귄다. 풀벌레 소리도 저마다의 소리로 존재를 알린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해준다. 가을 정취에 빠질만 하면 위도 38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이곳이 70년 전의 그 아픈 비극의 분단현장이라는 사실을 잊지말라는 듯 되새겨준다. 38선숨길은 위도 38선을 올랐다 내렸다 한다.

부소치고개까지 이광재 신부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남북으로 넘나들었던 디모테오순례길과 같이 간다. 한천산 정상 부근 38선전망대에 다다르자, 설악산 대청봉과 점봉산, 구룡령 고개가 연이어 보인다. 대청봉에만 구름이 걸쳐있고 쾌청한 하늘이다. 백두대간 능선이 뚜렷한 스카이라인으로 보여준다. 한천산은 백두대간 지선 정도 된다.

한천산 자락에도 38선을 나타내는 지시물이 세워져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설악산과 백두대간 능선이다.

한천산 자락에도 38선을 나타내는 지시물이 세워져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설악산과 백두대간 능선이다.

임도 옆 길 한편에 흙을 뒤집어 쓴 독버섯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순식간에 자라서 그런지 아직 흙을 머리 위에 그대로 이고 있다. 희한한 장면이다. 송이 대표산지와 더불어 토양 자체가 버섯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벌써 10㎞는 훨씬 더 걸은 것 같다. 다리에 힘이 빠질 시간도 됐다.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누워 한숨 자고 싶다. 하지만 걸어야 한다.

임도 길 중간에 자란 버섯이 너무 빨리 자랐는지 아직 흙을 뒤집어 쓰고 있다.

임도 길 중간에 자란 버섯이 너무 빨리 자랐는지 아직 흙을 뒤집어 쓰고 있다.

한천산을 걸어서 돌아가니 마을이 나온다. 1코스 마지막 마을, 도리(陶里)다. 도리는 동네에 점토가 많아 토기를 생산하던 장소라 해서 도리라 불렀다. 우리 말로 질골이라고도 했다.

하천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지나는 곳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흐르는 물도 많다. 하천은 남대천 지류다. 남대천은 3개의 하천이 합류해서 흐른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은 어성천으로 흐르고, 구룡령에서 발원한 물은 후천으로, 점봉산에서 발원한 물은 오색천으로 흘러 합수하는 하천이 바로 남대천이다.

남대천 바로 옆에도 38선이 지난다.

남대천 바로 옆에도 38선이 지난다.

도리를 가로지르는 하천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대천 상류 어성천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산에서 발원한 물이 넘쳐흐르며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다. 어성전(漁城田)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하천과 밭에서 나오는 각종 먹거리가 풍부해서 배불리 살기 좋은 이상향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어성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도로 옆 사이길로 들어서자 한국의학문화원이 나온다. 은퇴한 의사가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건립한 건물이란다. 그 옆이 남천학생체험학습장이다. 분단 당시 학교 교실은 북으로, 화장실은 남으로 갈렸던 그 비극의 장소다. 지금은 아는 듯 모르는 듯 학생체험학습장으로 변신해 있다.

남천국민학교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체험장으로 변해 사용되고 있다. 그 옆 38선숨길을 알리는 이정표.

남천국민학교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체험장으로 변해 사용되고 있다. 그 옆 38선숨길을 알리는 이정표.

동행 안내한 문화관광해설사 김기수씨는 “지금 걸어온 길은 38선숨길 중에 평화의 길이고, 나머지 통일의 길 19㎞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 임도지만 통제하고 있다”며 “역시 통일의 길은 접근하기도 이뤄지기도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평화의 길 19㎞와 통일의 길 19㎞를 합해 38㎞로 38섬숨길이다. 통일의 길은 아직 미개통 상태.

38선숨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길이었지만 길 자체의 역사적 의미와 10월 국군의 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걷는 길로서는 더욱 뜻 깊게 느껴진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김향칠

    10.01,2015 at 6:11 오후

    38선 이란 읽고보니 참으로 감회가 깊으네요 예날 젊은 시절에 15사단 38연대 가 체 동부전선 315고지 전투 에 치열했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도리켜보면 엇그제 같건만 많은 세월이 흘러서 내가 백발되고 참으로 덧없는 것은 세월이 군요 휴전머리 전투는 참으로 한치 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피아 간에 많은 전우들을 일었지요 전쟁은 인류사에 없어야 되고 더우기 동족간에 싸움은 처음니자 마즈막이 되길 간절히 천지신명께빎니다 그당시 06 군번들이 많이 히생되였지요
    06군번 바든 사람들은 그당시누런 작업복으로 신발 은 겨을 천막에 자고나면 땀찬 방한화가 꽁꽁
    얼어서 한참식 땅바닥에 두둘겨야 얼은게 깨저서 부드러워 저 신을수가 있엇어도 우리갗이 살은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보며 백발이 히도록살고있지만 전사한 전우들 생가하면 억울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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