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aryonartistSylviaWald
ExcerptsfromdocumentarybyBilPage
AmericanArtistPrintmakerSculptorPainter
FounderofSylviaWaldandPoKimArtGallery
- 뉴욕=한현우기자
입력:2012.04.2714:20
DocumentaryonartistSylviaWald
ExcerptsfromdocumentarybyBilPage
AmericanArtistPrintmakerSculptorPainter
FounderofSylviaWaldandPoKimArtGallery
평생반려자였던그의아내이자조각가실비아왈드마저작년봄95세를일기로숨진뒤,노옹(老翁)은오직캔버스앞에서붓을잡거나집안을마음껏날아다니는앵무새들과대화하며여생을보내고있다.지난13일뉴욕그의갤러리를찾아갔을때,그는병원에서신장투석을마친뒤휠체어타고갤러리로돌아오는길이었다.작년11월그림을정리하다가넘어져엉덩이뼈를다쳤는데,항생제치료를하면서신장이악화됐다고한다.그는“이제죽을때까지매주3회매번세시간씩신장투석을해야한다”며우울한표정을지었다.
“평생한국에가보고싶다는생각이없었는데,요즘들어한국에가고싶을때가있어요.모르겠어요,이게다내가죽을때가가까워진건지….”그는작년에좌골이부러진뒤죽음에대해부쩍많이생각하게됐다고한다.“백살까지그림많이그려서백살때서울에서전시회를크게하려고했는데,이래갖고백살까지살수있을지모르겠어요.”
그럼에도추상을주로그려온그의그림은퇴원후한층밝아졌다.“석달간입원해있을때천장하고벽을캔버스삼아서상상으로그림을그렸지요.그때구상한그림이꽤있는데아마도프리다칼로의그림처럼어둡고우울한그림이될거라고생각했어요.그런데나와보니완전히다른그림이나옵니다.밝고아름다운색이나와요.생의환희라고할까,그런것이내그림에묻어나와요.”
1917년
“여기가매력이많아서그냥눌러앉았어요.당시에한국엔미술가도화단(畵壇)이란것도없었어요.교환교수2년이끝난뒤뉴욕으로이사했죠.뉴욕이세계미술의중심이었고,지금도그러니까.불법체류로체포당하기도했지만그냥안나가고버텼어요.그림을그리려면이곳에있는수밖에없었어요.”
그나마조선대와인연맺은덕분에그는1990년대부터한국에조금씩알려졌다.조선대는지난2000년그의작품을기증받아미술관내에‘김보현실’을마련했고,작년9월‘김보현·실비아왈드미술관’을정식으로개관했다.이미술관에김화백의그림320점과실비아왈드의작품90여점이기증됐다.1995년예술의전당회고전때32년만에한국을처음방문하고,작년조선대미술관개관식에참석했던그는내년5월경남도립미술관전시를앞두고있다.
뉴욕에눌러앉아버린김화백은뉴욕남부소호거리의넥타이공장에취직했다.“화가를모집한다”는광고를보고찾아갔는데,주어진일이란넥타이에붓으로점과선을그리는것이었다.시간당1달러를받으며하루8시간동안넥타이에그림을그렸다.
“그래도뉴욕에있어야했어요.미술,음악,무용,영화모든게여기서는활발하죠.예술학교도많고자유롭고요.파리가미술의중심이라고하는말은몰라서하는말이에요.파리는2차대전때이미모두끝났죠.파리에서공부한일본인들에게서미술을배운사람들이파리,파리하는거예요.”
그는1960년대중반소호(SoHo·SouthofHouston)의탄생도지켜봤다고했다.“내가1958년까지소호에서살았어요.60년대들어소호에있던공장들이이사가면서,빈공장을작업실로쓰려는화가가많이이사했죠.그러면서소호가탄생한건데,이제는또완전히달라졌어요.예나지금이나미술이중심인곳은이스트빌리지뿐이죠.”
김화백은그러나히피문화에빠진적은없다고했다.“히피는너무자유스럽고무책임했어요.한번은내자전거를어떤사람이훔쳐가기에‘그거내자전거야’하고소리쳤더니‘그래서뭐?’라고대답하더군요.”
갤러리가있는8층짜리건물에서4층이갤러리,7·8층이김화백부부의작업실,옥상에는정원이마련돼있다.8층작업실에는커다란새장이있어‘찰리’라는이름의파란색암컷앵무새와핑크색깃털을뽐내는‘점블’이란앵무새가수시로소리를냈다.그는이곳에서줄곧작업을하면서백남준·김환기등과교류하며작품2000점가량을남겼으나값을매겨판작품은열점도되지않는다.김화백은“나는그림을누구를위해서도그리지않았다.나자신을위해그린것이므로그림을파는일에도전혀관심이없었다”고했다.
1968년미국인아내와결혼한그는슬하에자식을두지않았다.남편처럼자유로운영혼을가졌던그의아내역시1955년‘미국현대미술50년전’에작품이선정될만큼명성을누린예술가였다.김화백은“내가미국에눌러앉은것도,자식도마누라도없이이렇게아직도그림을그리는것도내게지워진운명”이라며희미하게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