烏川遺蹟地(오천유적지)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7-1

DSC05070[烏川遺蹟地(오천유적지) 정경]

경북 안동의 오천유적지는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인 광산 김씨 예안파의 문화재를 옮겨 놓은 곳이다.

본래 광산 김씨의 집성촌은 군자리라는 곳에 있었는데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군자리가 수몰지역으로 들어가자 이곳으로
중요 문화재들을 옮겨온 것이다.

지금도 오천유적지 입구에는 군자리라는 비석(실제는 오천리)이 서 있다.

DSC05114[군자마을 안내도]

DSC05072a[안내판 글 내용]

DSC05116[숭원각]

마을 입구 왼쪽에 숭원각이라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 유물전시관에는 고려시대의 호적과 교지, 노비문서, 분재기
고문서 1,000여 점과 각종 서책 2,000권 등 광산 김씨 예안파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DSC05074[안내판 글 내용]

DSC05076[枕洛亭(침락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오천유적지 경내의 주차장에서 동쪽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로 만나는 것이 梅園(매원)
金光繼(김광계, 1580∼1646) 공의 枕洛亭(침락정)이다.

자는 以志(이지)요 호는 梅園(매원)이다.
아버지는 近始齋(근시재) 垓(해)이고,
어머니는 眞城(진성) 李氏(이씨)로
퇴계 선생의 조카인 宰(재)의 따님이다.

선조 13년(1580) 8월 예안 오천에서 태어나
인조 24년(1646)에 향년 64세로 돌아가시었다.
8세에 小學(소학)을 배웠으며 14세에 양친을 여의고
슬퍼하며 예로써 상을 치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顯宗(현종) 13년(1672)에 건립하여
의병출신의 선비들을 모아 회의를 열던 정자이다.

매원은 光海君(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피해 이 곳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DSC05074[안내판 글 내용]

DSC05078a[枕洛亭(침락정) 현판]

DSC05077[枕洛亭(침락정)]

정면 4칸, 측면 3칸인데 중앙의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 2칸이 배치되어 있다.
그 소탈한 맛은 동서로 마주 세운 자그마한 출입문에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오천 문화재 단지의 집들은
크면 큰 대로 아담하면 아담한대로 맛을 지니고 있다.

집들을 찬찬히 둘러보면 창과 문의 위치와 비례,
창 위의 쪽창, 은근히 화려한 창살 등 눈여겨볼 구석이 많다.

DSC05079[안채로 통하는 작은 문]

작은 문은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허리를 굽히며, 겸손함을 배우라는 뜻이라 한다.

DSC05083[담밖에서 담은 養正堂(양정당)]

침락정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오천 유적지에서 물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양정당이 있다.

스승인 퇴계 선생이 당호를
지어주고 친필로 정자의 편액을 써 주었다고 한다.

金富信(김부신, 1523~1566) 자는 可行(가행) 養正堂(양정당)이다.
濯淸亭(탁청정) 金綏(김수)의 둘째 아들로 중종 18년(1522)에 태어났다.

DSC05084[養正堂(양정당) 안 정경]

퇴계의 문인으로 명종 13년(1558)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 독실하여 선생의 은총을 한 몸에 받고 장차 크게
성취할 인재라 촉망되었으나 아깝게도 수명이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養正(양정)’이라 함은 주역의 蒙卦(몽괘)에서
따온 것으로 ‘산밑에 샘물이 난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라 한다.

DSC05086[우측 溪巖亭(계암정)]

양정당 바로 뒤에는 최근에 건립된 계암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계암정은 설월당 김부륜 공의 아들인 溪巖(계암) 김령 선생의 정자이다.

높은 2단의 축대를 쌓아 그 위 높다랗게 지어놓은
계암정의 당당한 모습은 곧은 선비의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

DSC05081a[溪巖亭(계암정) 현판]
DSC05080[우측에서 담은 계암정]

DSC05093[芝厓亭(지애정) 입구표석]

DSC05091[문이 닫혀 있어서 담밖에서 담은 芝厓亭(지애정)]

DSC05096a[濯淸亭(탁청정) 현판]

탁청정 현판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DSC05098[좌측에서 담은 濯淸亭(탁청정)]

중요민속자료 제226호

이 건물은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조선 中宗(중종) 36년(1541) 세운 것으로 종택에 딸린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원래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4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옮겨온 건물 중
예안파 대종택의 사랑채였던 후조당과 탁정정이라는 정자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그외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세 채가 있다.

DSC05097[안내판 글 내용]

DSC05089[탁청정과 연못]

DSC05099[우측에서 담은 濯淸亭(탁청정)종택]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26호

이 집은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조선 中宗(중종) 36년(1541)
세운 것으로 조선 후기에 화재를 당하여 중건하였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고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한다.

이 집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ㅁ’ 자형 집으로 총 22칸이다.
이 지방의 큰 규모 주택들은 보통 5칸을 기준으로 ‘ㅁ’ 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탁청정 종가는 칸수 구성이 특별하다.

DSC05100[안내판 글 내용]

DSC05102[좌측에서 담은濯淸亭(탁청정) 종택 전경]

조선 후기에 사랑채가 발달하게 되어 사랑대청을 넓히고
기단을 높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으나
초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DSC05104[정면에서 담은 濯淸亭(탁청정) 종택 전경]

종택 앞쪽에 세워둔 솟대가 인상적이었다.
대문도 닫혀 있었지만, 이곳은 거주하고 계신다기에
여러각도에서 사진으로만 담고 통과 했습니다.

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
지역이나 목적에 따라 소줏대. 표줏대. 솔대. 거릿대. 수살목. 서낭대 등으로 불린다.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반적인 것은 긴 장대 꼭대기에
세 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것이다.

DSC05101[雪月堂(설월당)]

雪月堂(설월당)은 김부륜 선생의 정자 이름이자 선생의 호이다.
당호의 유래는 김부륜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오천에 정자를 지어 藏修(장수)의 터로 삼고자 하였는데,
스승인 퇴계 선생이 친필로 ‘雪月堂(설월당)’이란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이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은퇴한 뒤엔 이 곳에서 독서로 여생을 보내셨다.

DSC05106[안내판 글 내용]

DSC05107[□淸亭(읍청정)]

자는 愼仲(신중)이요 호는 □淸亭(읍청정)이다.
雲巖公(운암공) 緣(연)의 둘째 아들이며 후조당의 아우이다.

DSC05117[좌측에서 담은 □淸亭(읍청정) 전경]

중종 20연(1525) 오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詩書(시서)를 배웠으며, 일찍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經學(경학)과 道學(도학)을 닦아 동문인 鶴峯(학봉) 金誠一(김성일)이
으뜸으로 추대할 만큼 훌륭한 인품을 이루었다.

명종 10연(1555)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慈親喪(자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성균관에 유학했다.

DSC05108[後彫堂(후조당) 오르는 돌계단]

민속자료 제227호

後彫堂(후조당) 金富弼(김부필, 1516∼1577)
자는 彦遇(언우)이고 호는 後彫堂(후조당) 중종 11년에 烏川(오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미 문예에 높은 재주가 보였는데
1537년(중종 23년)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太學(태학)에
있으면서도 동료들 사이에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27세 되던 9월 부친상을 당하고 다음해 7월에 仁宗(인종)이
승하했으며, 아버지의 상을 벗은 다음해엔 承重(승중)으로 조부상을 당하였으니,
연달아 닥치는 슬픔에 삶의 의욕조차 잃을 만큼 심한 마음의 충격으로
벼슬 길에 나가 출세하려는 청운의 뜻마저 버릴 정도로 큰 심경의 충격을 받았다.

DSC05109[안내판 글 내용]

DSC05112[後彫堂(후조당)]

DSC05111[사당]

DSC05110[사당쪽에서 담은 후조당 옆 건물]

DSC05088[오천유적지 전경]

원래는 오천유적지를 코스에 넣지 않았는데…
지나는 길에 팻말이 보여서..
지나치다 다시 턴을 하여 들어갔다.

그랬는데…들리지 않았드라면 후회하였을 것같은
뜻하지 않게 숨겨진 보물을 찾아 기쁨으로 출렁였다.
휴일 다음날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사진찍기도 참 좋다.

우리와 비슷한 부부둘이서 오붓하게 이야기하며 고택을 구경하고 있었다.

DSC05121[잠시 쉬며 인증샷]

저 사람들의 눈에는 우린 어떻게 비쳐졌을까?
잠시 생각해 보며 아쉬운 발길을 다음 일정을 향하여 돌렸다.

DSC05122[주차장에서 담은 오천유적지 문화마을 전경]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주사 김효로를 모시기 위해
중종31년 그의 손자인 김부필이 후손들과 함께 세운 건물이며,
뒤쪽에 보이는 건물은 후조당 입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며
오천유적지 문화마을 전경을 다시 담아 보았습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3월 3일 at 8:59 오전

    나도 여기는 들린적이 있어요.
    안동은 참 볼거리가 많은 고장인데 잘 안가게 되더라구요.
    그리 멀지도 않는데…

    • 초아

      2016년 3월 3일 at 4:41 오후

      들린적 있으시다구요.
      하긴 언니도 전국구이시니 왠만한곳은
      다 들리셨을거에요.
      먼곳이라 못 들리는게 아니라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서일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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