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淵書院(예연서원)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539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1[禮淵書院(예연서원) 들어가는 길목에서…]

大邱(대구) 達城郡(달성군) 현풍읍을 지나 마산방향으로
가는 도로 가장자리를 통해 마을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현풍읍에서 3분정도 마산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한정교 앞 좌측 이정표 하단에 수청동. 가태리라는
안내표시가 있는데, 이곳이 達昌池(달창지)로 가는 길이다.

14[가태리 마을 입구]

가태리 방향으로 6분정도 달리면 達昌池(달창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마을길로 2분정도 곧장가면 야트막한 산 끝자락에
위치한 禮淵書院(예연서원)이 보인다.

2[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3[郭再祐(곽재우)장군 나무와 사당]

곽재우(1552년~1617)장군은 외가인 경남 의령에서 출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현풍, 창녕, 진주까지 작전지역으로 삼고 스스로
紅衣將軍(홍의장군)이라 하며 밝은 지리를 이용하여
위장전술과 유격전을 펼쳐 적을 섬멸하는 전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돌아가신 후 禮淵書院(예연서원)이 세워지고 숙종 35(1709)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忠翼(충익)이다.

서원앞 마을앞에 서 있는 수령 400년 정도 된
이 느티나무는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신출귀몰한 전략과 전술로
가는 곳마다 왜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둔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郭再祐(곽재우)장군나무’ 라 이름지었으며, ‘곽재우장군 나무’라는
이름표를 달고 우뚝하게 서있고, 그옆에는 紅衣將軍神道碑(홍의장군신도비)와
충렬공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4[홍의장군 신도비와 충렬공 신도비를 모신 사당]

畏齋(외재) 李厚慶(이후경 1558~1630)은 선생의 祭文(제문)에서
“큰 연못은 용을 잃었고, 깊은 산에 호랑이가 가버림에 길가는
사람들은 한숨을 쉬고 친구들은 통탄해 마지않았습니다” 라고 하여
선생을 잃은 슬픔을 드러내었으며, 大提學(대제학) 權愈(권유 1633~1704)는
神道碑銘(신도비명)에서 “거대한 도적들을 평정하여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물외에 노닐어 위대한 몸을 부렸도다.”라고 하여 그의 삶을 評(평)하였다

5[홍의장군신도비와 충렬공신도비]

禮淵書院(예연서원)은 忘憂堂(망우당) 郭再祐(곽재우)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光海軍(광해군) 10년(1618) 率禮洞(솔례동),
즉 지금의 大里(대리)에 忠賢祠(충현사)를 처음 건립하고 현종15년(1674)
당시의 현감이던 柳千之(유천지)가 규모를 확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안음 현감으로 황석산성의 수성장을
제수받아 왜군과의 격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存齋(존재) 郭逡(곽준)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홍의 장군 신도비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웠던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충렬공 신도비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안올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호남의 황석산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한 충렬공 곽준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곽재우(1552~1617) 선생의 신도비는 숙종 17년(1691)
이곳에 건립되었으며, 곽준(1550~1597) 선생의 신도비는
1663년(현종 4)에 편풍 대동에 세웠던 것을 곽재우 선생 신도비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겨 함께 모시게 되었다 한다.

6[郭逡(곽준) 나무]

곽준(1551~1597)선생의 본관은 玄風(현풍), 호는 存齋(존재)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忠烈(충렬)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丁酉再亂(정유재란) 때에는 영남과 호남의 길목인 함양의
黃石山城(황석산성)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履常(이상),
履厚(이후)와 함께 장열히 전사한 存齋(존재) 郭逡(곽준)선생을 기린,
은행나무로 300년 정도 수령의 ‘郭逡(곽준)나무’가 우뚝하게 서 있다.

7[崇義門(숭의문)]

그 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광해군10년(1618)
건립된 禮淵書院(예연서원)에 봉안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본인은 물론 두 아들과 며느리까지 함께 전사하여
一門三綱(일문삼강)을 이룬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곽준나무’라 이름 지었다.

이 書院(서원)은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최초의 義兵(의병)을
일으킨 선무원종 1등공신인 紅衣將軍(홍의장군) 忘憂堂(망우당)
郭再祐(곽재우)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618년(광해군 10)에
솔례동, 즉 지금의 대리에 충현사를 처음 건립한 데서 비롯한다.

8[禮淵書院(예연서원)]

현종 15년(1674) 당시 현감이었던 류천지가 규모를 확장하였다.
숙종 3년(1677) 예연서원으로 賜額書院(사액서원)이 되었고,
숙종 41년(1715) 현재 위치로 옮겨져 왔다.

지금의 모습은 6.25 동란으로 불타 없어진 건물들을
1977년과 1984년의 두 번에 걸친 복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예연서원은 포산 곽씨 문중이 경영하는 조선시대 사립학교로
맨 위쪽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사당인 충현사가 있다.

그 앞쪽에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강당인 경의당이 자리잡고 있다.

9[좌측에서 담은 禮淵書院(예연서원)]

숙종3년(1677) 禮淵書院(예연서원)이라
사액되었으며, 숙종41년(1715) 현재위치로 옮겨 왔다.

그뒤 고종 5년(1868) 大院君(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나 1982년 복원되었다.

예연서원은 苞山(포산, 현재:현풍) 郭氏(곽씨) 門中(문중)이
경영하는 조선시대 사립학교로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忠賢祠(충현사),
강당인 景義堂(경의당), 동, 서재, 고사, 삼문, 등이 있다.

10[정면에서 담은 禮淵書院(예연서원)]

사당에는 郭再祐(곽재우)와 郭逡(곽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天降紅衣將軍(하늘이 내린 붉은 옷의 장군)’의 기치를 내 걸고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선생은 1552년 8월 28일에
의령현 세천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庭庵公(정암공) 郭越(곽월)이시다.

나라가 倭賊의 침입을 당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義兵(의병)을 일으켰으며, 만년에는 自然(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忘憂堂(망우당)선생은 광해군9년(1617)
4월 10일 江舍(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1[典祀廳(전사청)과 東齋(동재)]

예연서원 옆 작은 문을 들어서니 전사청이 있었다.

典祀廳(전사청)은 향사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동재.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수학하던 곳이었다 한다.

지금의 모습은 6.25 동란으로 불타 없어진 건물들을
1977년과 1984년의 두 번에 걸친 복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가꾸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것 같기도 한데…
잡초가 무성함은, 여름날 잠시만 돌보지 않아도
무성해 지는 잡초의 질긴 생명력 때문인지..

제 멋대로 핀 개망초 꽃만이
뜰 가득 피어 한낮의 낮선 손님을 반겨준다.

12[典祀廳(전사청)]

나라의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이다.

국민들의 단결된 힘이 없었더라면 어찌 유구한 세월을 지탱하였을까?

위기를 당할때 분연히 義(의)를 떨치고 일어났던
祖上(조상)들의 큰 뜻을 한번쯤 되새긴다면 삶의 활력소가 되며,
오늘을 살아가는데 지표가 될듯도 싶다.

江舍偶吟(강사우음) / 廓再祐(곽재우)
강가집에서 우연히 읊다.

岩間犬吠知聲應(암간견폐지성응)
바위 사이라 개 짖으니 메아리 소리 들려오고
水裏鷗飛見影孤(수리구비견영고)
물속에 갈매기 나니 외로운 그림자 비치네.

江湖閑適無塵事(강호한적무진사)
강호라 한가로워 속세 일 없으니,
月夜磯邊酒一壺(월야기변주일호)
달 밝은 낚시터엔 한 단지의 술이라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3월 22일 at 8:13 오전

    초아님
    답사기를 책으로 엮어 내도 되겠습니다.

    우리가 대학시절 가야사를 전공한다고 가야의 옛터를 찾아
    경남.북 일대를 헤맬때 변변한 길라잡이를 해주는 책 한권이
    없었던 생각이 문득 납니다.

    책으로 펴내면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텐데요.

    • 초아

      2016년 3월 22일 at 2:57 오후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냥 제가 다녀온 곳을 잊지 않기위해
      기록할겸 올리는건대요.
      여러곳을 다니면서 담아온 사진과
      웹에서 자료를 찾아 제 생각도 보태어
      올리긴하지만,.. 책으로 엮는다는 건
      감히 생각도 못해보았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집은 한권쯤 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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