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 김삿갓 문학관 앞 뜰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913

IMG_4757[蘭皐(난고) 김삿갓 文學館(문학관) 전경]

난고 김삿갓문학관은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2[蘭皐(난고) 金炳淵(김병연, 1807∼1863) 인터넷에서 펌]

본관은 안동. 자는 性深(성심). 호는 蘭皐(난고).
속칭 金 笠(김 맆, 김삿갓)이라 한다.

1807년(조선조 순조 7년) 3월에 한양성의 북서쪽인
경기도 양주군 북한강 인접한 곳에서 태어났다.

5세 때인 1812년 12월 서북 지방(평안도)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 난’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조정의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고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에
저항해서 일어난 이 난은 단 10일 만에 청천강 북쪽 지역의 8개 군, 현을
장악해 버릴 정도로 백성들의 큰 호응과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이 때 공교롭게도 그의 할아버지인 金益淳(김익순)은
그 8개 군, 현 가운데 하나인 선천군의 부사 겸 방어사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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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죄로 대역죄를 받아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 때 다행히 할아버지를 뺀 나머지 가족은 목숨을 구했으나,
그는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가서 피해 살았다.

7세 때 가족이 다시 북한강변에 모여 살게 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병연만이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어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20세 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 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한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왔던 집안내력을 이야기 해 주었으니, 바로 김익순은 자신의 조부였다.

IMG_4756[여인과 주고받은 정담 詩]

김삿갓이 서당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 달밤에 밖을 나오니
누각에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 아닌가!
이에 김삿갓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시 한 수를 읊어 주자 여인이 김삿갓의 시구에 답을 한 시.

정담

樓上相逢視見明(누상상봉시견명)
다락 위에서 만나 보니 눈이 아름답도다
有情無語似無情(유정무언사무정)
정은 있어도 말이 없어 정이 없는 것만 같구나

여인 화답시

花無一語多情蜜(화무일언다정밀)
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간직하는 법
月不踰墻問深房(월불유장간침방)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을 찾아들 수 있다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불렀다한다.

세상 사람들은 삿갓을 쓰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삿갓’이라 불렀고,
어느만큼 인정을 나눈 사이에서는 性(성)인 ‘김’을 붙여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김삿갓’이란 뜻인 ‘金笠(김립)’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시인, 방랑시인 김삿갓. 짙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작품집으로 ‘金笠詩集(김립시집)’이 있다.

IMG_4758[시비 낙옆 2 와 김삿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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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해학과 서정, 관조적 허무와 격물정신으로 규정된다.
부정과 불의에 부딪치면 해학은 풍자와 조소의 칼이 되고,
절경과 가인을 만나면 서정은 술이 되고 노래가 되었다.

또한 인생을 살필 때는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되지만,
사물들을 앞에 두었을 때는 햇살이 되고 바람이 된다.
그의 자유혼은 시의 소재나 형식에서 규범과 탈규범을 넘나들기도 한다.

한시의 전통적 방식을 거침없이 해체해서 파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한시를 음이 아닌 뜻으로 읽게 한다든지,
한글을 섞어서 쓰는 시들이 그런 경우가 될 것이다.

그는 1863년(철종 13년)의 봄에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현(전남 화순군 동복면)
달천변에서 35년쯤의 긴 방랑시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그곳을 죽음의 자리로 택한 것은 무등산 자락에 있는
달천이 ‘적벽강’이라 부를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IMG_4761[삿갓의 노래 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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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편의 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찾아졌다.

無等山高松下在(무등산고송하재)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 있고
赤壁江深沙上流(적벽강심소상류)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 물이더라

하찮은 풍광도 그를 만나면 절경이 되고 평범한 사람도 가인이 되며,
애절한 눈물과 한숨도 한 줄기 노래가 되어 뭇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풍자시로 분류되는 ‘무등산과 적벽강’
따지고 보면 한 편의 풍경시요, 서정시라 할 수 있다.

박물관 밖 우측 담 밖에 붙은 그가 남긴 싯귀들…오른쪽부터 차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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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들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詩(시)들을 李應洙(이응수)가
전국을 돌며 수집, 정리하여 1939년에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며,

그 속에 실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한 시들과
흥미있고 통쾌한 일화들을 자료로 삼아, 여러 시인,
작가들이 시집과 소설로 발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시들을,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을 문학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그는 5세 때부터 이곳저곳으로 피해 살아야 했고,
청년기 이후에는 방랑생활로 일관했기 때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을 추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남긴 시와 일화들이 더욱
신비로우며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가 개성에 갔을 때에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그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땔감이 없어 못 재워준다고 했다.
이 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시가 이러했다.

邑名開城何閉城(읍명개성하폐성)
고을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山名松岳其無薪(산명송악기무신)
산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이 시는 해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문 또는 한시를 대중화한 것이다.
이런 것은 언문을 섞어 짓는 그의 모습에서 또 달리 나타난다.

김삿갓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도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시인’이었고 ‘민중시인’이었다고 하겠다.

박물관 밖 좌측 담 밖에 붙은 그의 일대기 왼쪽부터 차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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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이 팔도 유랑을 하며 어느 시골 장터
뒤의 허름한 장국밥 집에 들렀을 때의 일화라 한다.
죽장망혜에 걸망 하나 짊어진 그를 알아 본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어이, 자네 김삿갓 아닌가?” 다짜고짜 반말이다.
보아 하니 나이도 手下(수하)다.

“그렇소만… 지친 나그네를 알아주는 사람도 있으니 고맙구려.”
“자네 글 좀 안다고 소문났던데 시 한 수 지어 주면 오늘 밥과 술은
내가 사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혀가 반 토막도 아닌데 시종일관 下待(하대)다. 방앗간이
시원찮아 싸라기밥만 처먹었는지 싸가지라곤 반 푼어치도 없다.
그래도 술 한 잔에 밥 한 상이 어딘가, 든든히 잘 얻어먹고 난 뒤
지필묵을 대령하라 하여 일필휘지로 써 갈겨 내려갔다.

天脫冠而得一點(천탈관이득일점) 
하늘 천 자가 갓을 벗고 점 하나를 얻었으니 개 犬(견)자요,
乃失梅而橫一帶(내실매이횡일대)라.
이어 내 자가 지팡이를 잃고 옆으로 띠를 둘렀으니 아들 子(자)자로다.

破字(파자)로 풀어낸 두 글자를 합치면 犬子(견자) 즉, ‘개자식’이다.
글은 모르지만, 귀한 줄은 알았는지 시건방진 건달 놈이 허겁지겁 챙겨 넣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 개망신한 것을 뒤늦게 안 녀석이
죽자 사자 찾아 나섰으나 이미 김삿갓은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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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산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아서
채찍질 멈추고 천천히 가네
바위 사이로 겨우 길 하나 있고
연기 나는 곳에 두세 집이 보이네
꽃 색깔 고우니 봄이 왔음을 알겠고
시냇물 소리 크게 들리니 비가 왔나 보네
멍하니 서서 돌아갈 생각도 잊었는데
해가 진다고 하인이 말하네

破字詩(파자시)
파자를 하다.

仙是山人佛人不(선시산인불인불)
신선은 산사람이고 부처는 사람이 아니라네,
鴻惟江鳥鷄奚鳥(홍유강조계해조) 
기러기도 강변에 새인데 닭은 어찌 새가 아니랴!

氷消一點還爲水(빙소일점환위수)
얼음은 한 조각 떼 내어 녹이면 다시 물이 되고,
兩木相對便成林(양목상대편성림)
나무 두 그루 마주서니 곧 바로 숲을 이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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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長詩(훈장시)

훈장의 노래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 
세상사람 누가 훈장이 좋다고 하나
無煙心火自然生(무연심화자연생)
연기도 나지 않는 마음의 불이 저절로 난다

曰天曰地靑春去(왈천왈지청춘거) 
하늘 천, 땅 지 하면서 청춘이 다 가고
曰賦曰詩白髮成(왈부왈시백발성)
부이니 시이니 하면서 백발이 다 되었다

雖誠難聞稱道語(수성난문칭도어)
정성을 다해도 칭찬하는 말 듣기는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잠리이득시비성)
조금만 도리에 벗어나도 시비하는 소리 쉽게 듣는다

掌中寶玉千金子(장중보옥천금자) 
손바닥 속 보물인 천금같은 자식을
請囑撻刑是眞情(청촉달형시진정)
매로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니 이것이 참된 정이로고

아무리 천금과 같은 자식이라도 무조건 사랑으로만 덮을 것이 아니라
잘못했을 때는 따끔하게 매도 들어야 참된 사랑이라는 깊은 뜻이 글 속에
배어있기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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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은 시대 속의 풍자시인이며,
민중의 삶에 접근한 해학시인이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방곡곡을 다니며, 술을 좋아하고
익살을 즐기고 시를 잘 짓고 취하여 울기도 잘하는 인물로 묘사되어있다.
누구든 이곳을 찾으면 방랑시인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영월에는 김삿갓이 살아 있다.
김삿갓 그는 누구였나?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신비로운…
한편으로 다 올리기엔 무리일것 같아서, 나누어 올릴까 합니다.

오늘은 박물관 밖에서 해매었습니다.
내일 박물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4월 18일 at 7:38 오전

    김삿갓 묘까지 갔었는데 제가 갔을때는 문학관은 없었어요.
    아마 최근에 만들었나 봅니다.
    십몇년전이거든요. ㅎ

    김삿갓의 일화와 시에 대한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지요.

    송송백백 암암회 (松松柏柏 岩岩廻)
    수수산산 처처기 (水水山山 處處奇)
    소나무와 잣나무와 바위를 돌고 도니
    물과 산이 곳곳마다 기이하드라

    이 시는 평생 외우고 있거든요. 금강산인가에 가서 쓴 거지요.

    • 초아

      2016년 4월 18일 at 8:29 오전

      그랬나봅니다.
      저도 다녀온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언니보다는 늦게 갔나봅니다.
      문학관도 잘 꾸며놓았더라구요.
      김삿갓의 일화는 지금 들어도 흥미진진하지요.
      그 시는 저도 외우고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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