醉歌亭(취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97-3

IMG_5202[환벽당. 취가정 안내팻말]

IMG_5221[취가정 가는 길]

IMG_5222[醉歌亭(취가정) 오르는 돌계단]

환벽당에서 창계천 물길을 따라
약 2백m정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醉歌亭(취가정).

이곳은 의병장 忠壯公(충장공) 金德齡(김덕령, 1567~1596)의
외로운 충정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그의 후손인 김만식 등이 고종 27년
1890년에 창건했는데 1950년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5년 중건했다.
장군의 생애처럼 정자의 운명도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IMG_5230[굴뚝과 안내판 전경]

IMG_5223a[안내판 글 내용]

IMG_5224[취가정 주변 풍경]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얕으막한 산 위에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石洲 權糧(석주 권필, 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맺힌 노래 ‘醉時歌(취시가)’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詩(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醉歌亭(취가정)은 장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IMG_5204a[醉歌亭(취가정) 현판]

IMG_5225[醉歌亭(취가정)]

취시가라는 시의 제목을 따서 이름 붙여진 醉歌亭(취가정)
광주의 최대 번화가이자 상징길인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딴 것이다.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서 태어나
25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나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받고 혹독한 고문 끝에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쳐야했다.

IMG_5203a[醉時歌(취시가) 詩碑(시비)]

취시가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군의 애끓는 심경이 담겨있다.
이 취시가를 들은 권필은 장군의 넋을 위로하고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권필의 답시

將軍昔日把金戈(지난 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壯志中최奈命何(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리)
地下英靈無限恨(돌아가신 그 넋의 그지없는 눈물)
分明一曲醉時歌(분명한 한 곡조 취시가로 읊으셨네)

IMG_5226[우측에서 담은 醉歌亭(취가정)]

김덕령은 진주에서 전쟁 준비를 마치고
싸우겠다고 요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적군을 눈 앞에 두고도 싸우지 못하는 울분과 점점
불리해지는 주위 여건을 쇄신시키기 위해 그는 군법을 엄하게 세웠다.

한번은 태만한 역졸을 죽이고 도망간 군사 대신 그의 아버지를
잡아와 치죄하려 했는데 그 군사는 도체찰사의 노비였다.

마침 남방을 순시 중이던 도체찰사가 이를 알고
김덕령에게 석방 요청하였으나, 요청을 응낙하고서도
그가 돌아간 뒤 그 노비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도체찰사는
“김덕령은 신의가 없고 살인을 좋아하며 장수의 자질이 없는 자”
라고 모함,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1661년 그의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회복되고
정조 12년(1788) 나라에서 ‘忠壯(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마을에도 忠孝里(충효리)라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IMG_5228[醉歌亭(취가정) 옆모습]

김덕령 장군에 얽힌 설화가 많이 내려온다.
그 중 몇가지를 올려봅니다.

김덕령 은 백 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닐 만큼 힘이 대단하였으며,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을 만큼
용력 또한 대단하여 임진왜란시 김덕령 장군의 소문을 들은 왜장은
김덕령의 怜像(화상)만 보고도 지레 겁을 먹고 군대를 철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부친의 상을
당하게 되어 어머니의 만류로 전정에 출전할 수 없어 답답함을
추스르려고 싸움 구경을 나갔다가 의기가 발동하여 왜장의 진중에 쳐 들어가
도술을 부려 그들을 두렵게 하여 물러나게 했다 한다.

또 무등산 지공터널 위로 오르면 두 바위사이로
통로가 나있는 문바위에서 궁마(말 타고 활 쏘는)무술을 연마할
때 삼십 리 밖에서 이 바위를 과녁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온다.

산등에 올라가면 무성한 소나무 사이에
큰 바위 하나가 있는데 이 바위를 살 바위라 한다.

살 바위 까지 화살을 쏘고 백마가 먼저 도착하는지
시험하였다가 화살을 찾지 못하고 백마가 늦었다하여
백마의 목을 치자 그제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꽂혔다.

이 바위에 말발굽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말 무덤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馬山里(마산리) 라고 부른다.

鷺山(노산) 李殷相(이은상)은 시를
지어 김덕령 장군과 백마의 한을 달래주었다

德齡(덕령) 이 어디 갔나, 백마야 어디 갔나
어허 덕령이 어디 갔나, 백마 데리고 어디 갔나
오늘은 청궁 마산리로 말 달릴 이 없구나!

IMG_5208[환벽당과 취가정을 둘러보고 나가는 길]

아득한 후손이 장군님의 애달픈 마음을
한 줄 어설픈 시로 달래드리려 올려봅니다.

무등산 호랑이(김덕령) / 草阿(초아) 박태선

힘과 용맹은 무등산 호랑이와 겨루었고
올곧은 충성심은 하늘 향해 뻗쳤건만

억울한 누명으로 짧은 생
마침이 못내 서러워

꿈속에서 읊은 취가시 한 자락은
그 이름과 함께 찬란히 빛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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