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에 길이 빛날 蹈海壇(도해단)

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바닷가)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33-1-15

IMG_9376[蹈海壇(도해단) 전경]

蹈海(도해)라는 말은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죽겠다’
저항했던 중국 제나라 노중련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 영해에 실제로 목숨을 던져 절의를 지킨 인물이 있었다.

IMG_9377a[아래 안내판 글 내용]

IMG_9379a[윗 안내판 글 내용]

IMG_9382[蹈海壇(도해단) 전경]

순국지사들은 자신을 깨끗이 간직한 채 운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택했다.
각자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단식, 음독, 할복, 권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IMG_9389[蹈海壇(도해단)]

경북 영양 출신의 碧山(벽산) 金道鉉(김도현) 의병장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남겼는데, 이른바 ‘蹈海(도해)’ 걸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순국했던 것이다.

IMG_9380a[汕水巖(산수암)]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순국의 뜻을 품었고 부친의
장례를 마친 뒤 산수암에서 절명시를 짓고 ‘蹈海(도해)’를 결행하였다.

“바다에 빠진 시신을 수습하여 염(殮)하는 것은
뜻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
가족에게 일렀다한다.

그 날이 1914년 12월 23일(음 11.7) 동지로, 그의 나이 64세때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IMG_9385a[절명시 전문]

현재 대진해수욕장 해안가에는 그의 자정순국을 기리는
‘蹈海壇(도해단)’이 서 있고, 여기에는 순국 전날 대진 ‘汕水巖(산수암)’에서
지은 ‘絶命詩(절명시)’가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SAM_0938[蹈海壇(도해단) 과 碑(비) 전경]

‘絶命詩(절명시)’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피 온 간장에 엉키었는데
중년의 19년동안 머리카락만 늙어 가을서리 내린 듯 하네
나라가 망함에 눈물은 하염없으며 어버이 여의니 마음 또한 아파라
홀로 선 옛 산은 푸른데 온갖 계책 헤아려도 아무른 방책이 없네.
만리길에 바다를 보고자 하니 이례가 마침 동짓날이라
희디힌 저 천리길 물속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만 하여라.

SAM_0934[碧山先生 金道鉉 蹈海碑(벽산선생 김도현 도해비)]

SAM_0935[朝鮮義士 碧山 金先生 蹈海建(조선의사 벽산 김선생 도해건)]

IMG_9390[蹈海壇(도해단)]

이碑(비)는  원래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필로  千秋大義(천추대의)
쓰신것이였으나 어느 무지몽매한 학도들이 바다에 빠뜨린 것을
후손들이 복원하여 오늘에이르렀다.

IMG_9392[蹈海壇(도해단)이 있는 앞 바다]

1852년 영양 청기에서 태어난 김도현은
1895년 음력 11월 단발령을 계기로 1차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IMG_9395[蹈海壇(도해단)에서 본 옆 전경]

그뒤 1905년 11월 을사늑약 때는 직접 서울로 올라가 반대투쟁을 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고향으로 내려와 재차 의병을 일으켰지만 또다시 패산하고 말았다.

IMG_9396[蹈海壇(도해단) 뒤 전경]

항일투쟁으로 일관하던 김도현 의병장은 곧이어 닥친
1910년의 국치로 인해 삶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도덕적 양심과 의리에 철저했던 그의 의식세계는 일제강점을 용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노부모가 계셨기에 삶을 하루하루 연장해 나가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절명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한다.

IMG_9400[蹈海壇(도해단) 앞 바다]

원래 이름 ‘道鉉(도현)’조차 조상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왜적의 세상에서 쓰는 것은 치욕이라 여겨 ‘燾鉉(수현)’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선생의 기개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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