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문화관(1층 전시실)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449

20180119_132302[향촌 문화관 입구 전경]

이곳은 1970년대까지 대구의 중심 이른바 ‘시내’로
불리며, 멋쟁이들이 몰려들던 최고의 상업지역이었다.

이름난 다방, 술집, 음악감상실 같은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어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던 번화가였다.

20180119_132312[입구 쪽에서 담은 옛 향촌동 안내도]

세월이 흘러 조금은 빛바랜 거리의 모습이지만,
대구와 한국의 삶 한가운데를 껴안았던 이 골목의 애틋하고도
소중한 이야기들을 간직하기 위해 향촌 문화관을 세운 것이라 한다.

연대별로 나눈 대구 향촌동의 변천사 둘러보실까요.

20180119_132321[1900년(읍성은 헐리고 근대 대구의 중심지도)]

20180119_132328[향촌동 1900년, 년도별 설명 글 내용]

20180119_132334[1920~1919년(대구의 새로운 도심]

20180119_132339[1920~1944년(해방정국 대구)]

20180119_132344[1945~1948년]

20180119_132350[1950~1959년]

20180119_132357[대구의 변천사]

20180119_132408a[근대로의 여행안내 글 내용]

20180119_132420[명통구리 양복점]

중앙로는 대구 정거장 앞에서 동성정 3장목(동성로3가)
까지를 남북으로 잇는 약 1.05km의 도로이다.

중앙통으로 불리던 너비 12간(약 22미터)의 이 도로가 개통.
확장되면서 주변 일대는 급격하게 주거지와 상업지로 바뀌었다.

20180119_132537[쇼윈도 너머 명통구리 양복점 내부 전경]

중앙통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공보원, 한국은행 대구지점 등의
각종 금융기관을 비롯하여 만미당과 고려당 등의 빵집, 화가 이중섭과 시인 구상이
드나들던 경복 여관과 수복 여관, 그밖에 다방, 금은방 양복점들이 즐비하였다.

20180119_132545[명통구리양복점 안내 글]

1950년대 중앙로는 양복점 거리로 각광을 받았다.
6.25전쟁 발발 이후 서울과 전국 각지의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맞춤양복이 유행하였고, 대구역에서 중앙로 네거리 사이에 양복점이 속속 들어섰다.

한때 중앙로 남쪽까지 약 100여 개의 양복점이 줄을 이어 開店(개점) 하였다.

20180119_132602[명통구리 양복점 내부]

명통구리 양복점 이곳에서 의복체험도 할 수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양복을 입어보시고, 그 옛날의 멋쟁이가 되어보셔요.

20180119_132614[우리나라 최초의 府榮(부영) 버스 모형]

대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내버스를 도입하여 운행하였다.

20180119_132627[골목에서 노는 그 시절 아이들]

고무줄놀이와 숨바꼭질 함께 하였던 그 시절이 그립다.

20180119_132555[애안당]

한때 애안당 하면 안경점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20180119_132643[대구역 모형]

먼저 온 여학생들이 모자와 윗옷으로 갈아입고 기념 촬영 중이네요.^^

20180119_132655[대구 공구]

대구 산업의 기반, 북성로 공구골목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을 허문 뒤 새로 낸 신작로였다.
흔히 대구역 네거리 대우빌딩에서 달성공원 입구에 이르는 1.42km의 길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에는 대구부 서상면 지역에 속했지만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원정 1정목과 원정 2정목으로 나뉘었고,
8.15광복 후인 1947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洞(동) 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대구 북성로 1가, 북성로 2가가 되었다.

20180119_132708[대구 공구골목 재현]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중심지로,
미나까이백화점(三中井) 본점이 있었던 곳이다.

골목 입구에는 완구점과 주류, 모자를 파는 소매상이
자리 잡았으며, 특히 양복과 포목을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

광복 후부터 북성로 거리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이나 드럼통으로
수도관이나 리어카 바퀴 등을 만드는 철물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그와 함께 기계공구상들이 자리 잡게 되면서 차츰 철물 거리로 바뀌었다.

20180119_132722[미성당(금은 방)]

호기심 많은 아이가 미성당 쇼윈도 너머 귀금속을 구경하고 있네요. ㅎ

20180119_133227[황금당(금은방)]

그 시절 대구에서 결혼하였다면 아마도 미성당이나,
황금당에서 결혼예물을 맞추신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20180119_132745[대구역 모형 쪽에서 담은 앞쪽 전경]

20180119_132817[팔방놀이]

돌멩이를 번호가 적혀있는 칸에 한번에
던져놓고, 깨끔발로 뛰고 뒤돌아 다시 오는 팔방놀이
옛 동무들과 함께 놀던 생각이 났다.

별다른 장난감 하나 없이 하루 종일 바깥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땅따먹기, 팔방 놀이, 등등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쓩~~

20180119_133503[모형으로 만든 대구역 전경]

20180119_132905[장롱 속 이야기]

멀티 테마 영상실에서는 대구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근대 관련
사진자료 등으로 구성된 영상 ‘장롱 속 이야기’를 감상하는 코너입니다.
백 년에 세월을 넘나드는 우리들의 역사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전 패스…

20180119_132852[미국공보원]

전쟁 시기 문화 예술 활동의 중심, 미국공보원

대구 미공보원은 미 문화원의 전신으로 1948년 6월 중앙로에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삼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이중섭. 원석연. 정점식. 이경희 등
주요 화가의 개인전 및 김진균 등의 작곡 발표회, 클래식 음악 감상회 등을 열어
전쟁 시기 대구의 문화예술 보급에 이바지하다가 1997년 문을 닫았다.

20180119_133304[교동시장]

교동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 51-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 가면 없는 게 없다 하여,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린다.

20180119_133311[교동시장]

6.25전쟁 후 피란민들 사이에 미군 PX에서 흘러나오는 물품이 활발하게
거래되기 시작하자, 이곳을 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1952년 2월 재무부로부터 공설 납세조합 허가를 받았다.
(그 후 양키시장으로도 불렀다.)

20180119_133343[국수틀]

1940~50년대 밀가루 반죽을 통에 넣고, 손으로 돌려 압력을 가해 국수를 뽑는 틀

현재 골목마다 의류, 귀금속, 화장품, 컴퓨터 상점들이
몰려 있으며, 시장 입구에는 냉면, 오징어 부침개, 납작 만두 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20180119_133334[노상 음식점 전경]

20180119_133356[냉면, 따로 국밥]

20180119_133409[부침개(전)]

20180119_133417[누릅국수, 납작 만두]

20180119_133422[만물상]

20180119_133429[교동시장 뒷골목]

20180119_133434[리어카]

20180119_133240-1[교동시장의 옛 사진]

1956년 3월 교동시장으로 허가를 받은 후
구제품과 화장품 등 각종 수입품을 파는 시장으로
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20180119_133446[생활용품]

특히 300곳이 넘는 귀금속 상점과 80여 제조업체가
밀집한 ‘패션 주얼리 특구’가 2005년부터 조성되어 성업 중이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1월 30일 at 9:32 오전

    그곳에 내친구네 가게 정금당도 있었ㅈ요.
    금은방을 꽤 오래 했었죠.
    이제는 자꾸만 사라져 가는 전통시장과
    골목상가들을 기념으로 남기는 대구시에
    박수 쳐 드립니다.

    • 초아

      2018년 1월 30일 at 6:38 오후

      맞아요. 저도 기억납니다.
      정금당도 있었어요.
      향촌동은 특별했지요.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래졌지만,
      그 옛날의 명성은 잃지 않고 이렇게 남아있네요.
      언니의 박수 대구시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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