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월의 봄 특별전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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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향촌 문화원에서 승강기를 타고 4층으로 곧장 올랐다.
오늘은 고월의 봄을 만나려 가야 하니까…
4층 승강기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옆벽에는
‘당신의 봄은 어떤가요?’란 글이 적혀 있었다.

나의 봄… 글쎄 나의 봄은 질문의 답을 생각해 보느라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나의 봄은 그냥 봄일 뿐이지 뭐… 야 봄이다.

20180323_132355[대구문학관 4층 기획 전시실 입구 전경]

20180323_132405[고월의 봄, 뽑기맨 작가와의 만남 안내 포스트]

20180323_132413[입구에서 담은 고월의 봄 기획 전시실 내부 전경]

李章熙(이장희, 1900년~1929년)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번역문학가이다.

본관은 仁川(인천). 본명은 李樑熙(이양희), 아호는 古月(고월).
대구 출신. 1920년에 李樟熙(이장희)로 개명하였으나 필명으로
章熙(장희)를 사용한 것이 본명처럼 되었다.

아버지는 李炳學(이병학)이며, 어머니는 朴今連(박금련)이다

20180323_132424[古月 李章熙]

20180323_133106a[古月 李章熙]

1924년 ‘금성’ 3월 호에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 작품과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신민’,’생장’,’여명’,’신여성’,’조선문단’
잡지에 동경’, 석양구’,청천의 유방’, 하일소경’,’봄철의 바다’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요절하였기에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
시 11편만 실려 전해지다가 제해만 편 이장희전집’(문장사, 1982)과
김재홍 편 이장희전집평전’(문학세계사, 1983)등 두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20180323_132434[상화와 고월 1951년 9월 발행, 대구문학관 소장]

20180323_133052a[尙火와 古月 책 표지]

page[상화와 고월 책 속에 실린 글 ]

20180323_132441a[이장희 추도식(1929. 12.1)]

20180323_133036[기획 전시실 고월 기획전 전경]

20180323_132449[찬란하게 빛나던 별이 사라지던 날]

육체적으로도 한계점에 달해 있었던 고월은
1929년 새벽, 자신이 희구했던 절대 자유를 얻기 위해 음독했다.
노트 한 권, 헌 만년필 한 자루를 남기고 그는 옛 달이 되었다.

20180323_132504[고독의 의미]

겨울인데 불도 넣지 않은 서울 장사동 28번지
사랑채에서 때 묻은 포대기 한 장으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방 안에 있는 비치품은 뚜껑 없는 잉크병,
철필 한 자루, 잡지 한 권과 원고지 몇 장이 전부였다.

20180323_132531[나의 꿈은 온동, 글이 되었다.]

목우 백기만의 주선으로 <금성> 동인이 된
’24년 5월에서 29년 11월’까지 도합 40여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찾아낸 것은 34편이고,
유고 8편은 분실된 채 영 행방을 모른다.

20180323_132546[몰래 널, 동경하고 있어]

고월의 생애에서 가장 평온했던 동경 생활,
일본인 문학소녀 에이코에게 연정을 품다.
그러나 매사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격 탓에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귀국한다.

20180323_132559[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는 운동을 싫어했고, 친하게 지내는 아이도 없이
늘 혼자였지만 착실하고 예의 바른 모범생으로,
1912년 졸업할 때까지 몇 차례 급장을 했을 뿐 아니라
서도와 그림은 전교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20180323_132609[고월의 봄]

20180323_132617-a1[봄은 고양이로다 / 고월 이장희]

20180323_132617-a2[하일소경 / 고월 이장희]

20180323_132625a[고월 이장희 약력]

anigif [전시된 작품 중 책표지 애니메이션 편집]

20180323_132651[전시된 작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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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3_132643[전시된 작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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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3_132633[전시된 작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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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3_133023[전시실 내부에서 담은 출입구 쪽 전경]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
서구 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鄭芝溶(정지용)과 함께 한국 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3월 26일 at 7:08 오전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는 널리 애송된 시지요.
    대구가 낳은 문인들이 참 많아요.
    하기사 경주 좁은 곳에서도 김동리, 박목월 이런 분들이
    나왔으니까요.

    나, 오늘 제주갑니다.

    • 초아

      2018년 3월 26일 at 7:37 오후

      저도 외우고 있는 시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대구에 내려와 자리한 사람도 있었지만,
      고향이 대구였던 문인들도 참 많습니다.
      김동리, 박목월 문단의 거목이셨지요.
      제주도 잘 다녀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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