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 선생 묘소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3호

20180418_085646a[표암 강세황 선생 묘소 안내판]

20180418_090456[안내판과 묘소로 가는 길 입구]

근처 공터에 주차를 해 놓고 여기서부터 걸어
한 구비 돌면 곧장 표암 강세황 선생의 묘소가 보입니다.

20180418_083735[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 묘소 전경]

본관은 晋州(진주). 자는 光之(광지), 호는 添齋(첨재). 豹翁(표옹).
路竹(노죽). 山響齋(산향재). 豹菴(표암), 시호는 憲靖(헌정).
숙종 39년(1713) 한양에서 태어나 정조 15년(1791) 세상을 떠났다.

20180418_083759[신도비와 안내판 묘소 전경]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 화가이다.
진주 강 씨 5대 가운데 강세황은 조선 후기 유명 화가인
김홍도와 신위의 스승이자 그는 詩(시). 書(서). 畵(화)에 고루 뛰어난
三絶(삼절 : 3가지 재주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높은 안목을 가진 감식안이 자 서화 평론가로 이름이 높았다.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 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SAM_2212[남편이 담은 신도비와 안내판 묘소 전경]

남편이 디카로 담은 표암 강세황 선생 묘소 전경
디카로 담은 사진이 휴대폰으로 담은 것보다 때깔이 더 좋은 것 같네요.
남편이 담은 답사 사진 속에는 제가 있네요. ㅎㅎ

20180418_083833-0-vert[안내판 글 내용]

20180418_083817[姜世晃(강세황) 神道碑(신도비) 전경]

신도비는 거북 대좌 위에 높이 173㎝, 너비 61㎝, 두께 31.5㎝의
烏石(오석) 비신을 세우고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이수를 얹었으며,
그 주위는 화강암으로 보호 난간을 둘러놓았다.

20180418_084846[좌측에서 담은 姜世晃(강세황) 神道碑(신도비) 전경]

신도비는 4면 비로 비제는
‘正憲大夫漢城府判尹諡憲靖豹菴姜公世晃神道碑銘’
(정헌대부 한성부 판윤에 헌정 표암 강공 세황 신도 비명)이다.

20180418_083855_HDR[姜世晃(강세황) 神道碑(신도비) 뒤 전경]

비문은 문학박사 李家源(이가원)이 지었고
글씨는 姜亨植(강형식)이 썼으며 8세손 강태수와 강태관이 세웠다.

20180418_083911[豹菴(표암) (강세황) 선생 묘소 전경]

할아버지는 판중추 부사를 지낸 姜栢年(강백년)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姜鋧(강현). 어머니는 광주이 씨 李翊晩(이익만)의 딸이다.

20180418_083933[豹菴(표암) (강세황) 선생 묘]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강세황 자신까지 71세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三世耆英之家(삼세기 영지가)로 칭송받았다.

耆老所(기로소)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文臣(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 기구이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安山(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20180418_083938[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전경]

20180418_083943[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전경]

床石(상석)과 香爐石(향로석)을 세우고 좌우로
文人石(문인석), 望柱石(망주석) 각 1조를 갖춘 配置形態(배치 형태)는
묘소의 형태와 석물들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조선시대 일반형 묘소라 합니다.

20180418_083949[우측 文人石(문인석)]

20180418_083954[좌측 文人石(문인석)]

20180418_084039[묘소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習氣(습기)도 俗氣(속기)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 화훼가 그림의 주 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20180418_084026[묘소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작품으로는 添齋畵譜(첨재화보)’,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臨王書帖(임왕서첩)’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豹翁自誌(표옹자지)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李瀷(이익), 沈師正(심사정), 姜熙彦(강희언)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으며,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金弘道(김홍도)申緯(신위)가 주목된다.

20180418_084057[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 묘소 전경]

강세황 묘역 뒤편에는 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의 묘소이다.

20180418_084121[좌측 문인석]

20180418_084135[우측 문인석]

20180418_084112[묘비와 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 묘]

2개의 봉분 중 강계년 선생과 初娶(초취) 화순최씨와 합장 봉분과
그리고 二娶(2취) 파평윤씨와 三娶(3취) 강진 유 씨 합장 봉분으로
4위 합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합니다.

20180418_084157[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20180418_084632[내려오며 다시 담아 본 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 선생 묘와 안산 전경]

다시 시작하게 된 답사가 참으로 고맙고 행복합니다.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은 작은 욕심입니다.
아니 어쩌면 큰 욕심이기도 하겠지만, 주어진 몫의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 합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4월 20일 at 7:56 오전

    안산의 단원구는 김홍도가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우러 다닌곳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안산에는 단원구도 있고 단원고도 있어요.
    강세황의 묘는 진천에 있군요.
    이제 많은곳을 다니시게 되어서 축하합니다.

    • 초아

      2018년 4월 20일 at 9:07 오후

      안산의 단원구가 그런 뜻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군요.
      첨 듣습니다.
      예, 진천에는 많은 명당장소가 있다합니다.
      살아 용인 죽어 진천이란 말도 그래서 생겼다 합니다.
      그러나, 그건 틀린말이라 하네요.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 맞다 합니다.
      뜻 풀이를 하려면 길어서 생략합니다.
      아직은 조심 또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이만하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참 고마운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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