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興遠(최흥원) 旌閭閣(정려각)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75

20180425_150942[마을 입구에서 담은 崔興遠(최흥원) 旌閭閣(정려각) 전경]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門(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旌閣(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곳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선생을 기리는 旌閣(정각)이다.

20180425_150958[안내판]

둔산동 옻골마을 중간에 위치한 이 건물은 조선후기 영남의 대학자이자
효를 위한 덕목을 정하고 부모의 병을 극진히 돌보는 등 효행으로 유명하였던
百弗庵(백불암) 崔興遠(최흥원)을 기리기 위해 1789년 조정의 명으로 세운 것이다.

최흥원은 둔산동 옻골마을 입향조인 臺巖(대암) 崔東?(최동집)의 5대손으로
1705년태어나 82세를 사는 동안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130여명의 많은
제자를 기르며 향약을 실시하는 등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 南野(남야) 朴遜慶(박손경)과 더불어
嶺南三老(영남삼로)로 추앙을 받으며 당대 영남 퇴계학맥을 이끌었다.

1784년 정조의 첫째 아들이었던 문효세자의
翊衛司翊贊(익위사익찬)이 되어 스승이 되었다.

정려각은 단순한 구조로, 벽면 상부에 홍살문이 설치된
1칸의 비각을 중심으로 주위에 토석담장이 네모꼴로 둘러져 있다.

최흥원정려각은 규모는 작으나 18세기 후반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안내판 글 옮겨 적음)

20180425_153141_HDR[담너머로 담은 旌閭閣(정려각)]

백불암 선생은 1705년 태어나 1786년 향년 83세로 타계한 문신이며 대학자다.

선생의 자는 汝浩(여호). 호는 초기에는 數咎庵(수구암)으로
불렀다가 61세 되던 정월 초하룻날에 百弗庵(백불암)으로 바꾸었다.
조선후기 영남의 대학자로 후에 漆溪(칠계)선생이라 하였다.

백불암 선생은 영남 三老(3로)중의 한분이다.
三老(3로)란 3명의 큰 스승을 의미한다.

대구에는 백불암 최흥원 선생, 안동에는 대산 이상정 선생,
상주에는 남야 박손경 선생 등 존경받던 세분의 큰 노인의 칭호이다.

20180425_151011_HDR[담너머로 담은 旌閭閣(정려각)]

백불암 선생은 벼슬은 하지 않고 숨어 살던 학자인 隱逸(은일)로서
경모 궁수봉관, 장능참봉, 동봉교관, 장악 원주부, 공조좌랑, 익위사 좌익찬,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으로 제수되었으나 관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그는 부친의 병한 중에도 대변을 맛 보아가면서 탕제를 조절했던 효자였으며,
사후 3년만인 정조 13년(1789) 나라에서 孝行(효행)으로서 旌門(정문)을 명 하였다.

백불암은 효의 실천으로 후세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은 그 처음 근원이 효도에 있었다’고 言行錄(경행록)에 기록하고 있다.

20180425_152427[마을 안쪽에서 담은 崔興遠(최흥원) 旌閭閣(정려각) 전경]

백불암 선생은 도덕과 학문이 당시 유림의 師表(사표)가 되었다.
선생은 평생 학문과 실학,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지 벼슬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수차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를 위한 공부는 하지 않고 성리학의 공부와 선비수련인 敬(경)공부에만 전념했다.

가문의 규범을 제정하여 가문번영의 기초를 만들고 향약을 추진하여
주변마을의 경제적 자립과 도덕함양에 힘쓰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평생을 바쳤다 한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5월 23일 at 5:16 오후

    어제는 새벽까지 이웃들이 전화를 걸어와서 혼났습니다.
    위블에 들어갈수가 없다고 아우성이었어요.
    즐겨찾기를 안해 놓았던 분들은 많이 황당했었지요.
    그래서 컴을 켜고 일일히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알려주느라…
    참 내가 조선일보에서 월급 받는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옛 효자들은 대변맛도 보고 손가락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기도
    하고… 대단했지요.
    우리는 이제 효 소리도 못합니다.

    • 초아

      2018년 5월 23일 at 8:05 오후

      아이쿠 수고 하셨어요.
      그만큼 언니를 믿는다는 말이잖아요.
      무엇이든 해결해 줄것이라 믿는 마음.
      조선일보에서 월급 받는것보다 이웃의 믿음이 더 윗길이라 생각합니다.
      옛효자들은 도저히 따라 갈수 없지요.
      아니 비슷하게 흉내도 못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기에
      효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도 생겼났겠지요.
      효는 하고 싶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잠시의 효는 할 수 있어도 오래가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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