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峯書院(월봉서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452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20180601_091825_HDR[월봉서원 외삼문 望川門(망천문) 전경]

월봉서원의 역사는 고봉 선생 사후 7년만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지금의 신룡동인 낙암 아래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20180601_091945a[望川門(망천문) 현판]

20180601_091847_HDR[월봉 서원 외삼문 望川門(망천문)]

그 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지금의 산월동인 동천으로
옮겼는데, 효종 5년(1654) ‘月峯(월봉)’이란 서원명을 내리면서(사액)
사우와 동. 서재, 강당을 갖추었다.

20180601_092006[빙월당 표석비와 안내판]

20180601_091956a[빙월당 안내판 글]

빙월당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이 건물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을 비롯한 조선시대 학자들을
모셨던 월봉서원의 강당이다. 빙월당의 당호는 효종이 내린 제문에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精金潤玉(정금윤옥) 水月氷壺(수월빙호)
뜻으로 전해진다.

기대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당대의 석학들과 학문을 논하며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이황과 주고 받은 사칠이기론으로
유명하다. 월봉서원은 1578년 선조11년 낙암 현 신용동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때 피해를 입고 동천 현 산월동에 세워졌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1941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빙월당을 짓고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외삼문의 건립이 시작되어 1981년에 모두 준공되었다.(안내판 글 내용 옮겨 적음)

20180601_092040_HDR[월봉 서원 전경]

그 뒤 월봉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고,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짓고 1978년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을 건립하여 198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80601_092029_HDR[묘정비와 빙월당 전경]

빙월당은 광주광역시기념물 제9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 ‘高峯集(고봉집)’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고봉 기대승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인 춘. 추향사제를
매년 3월과 9월의 초정일에 월봉서원 사당인 숭덕사에서 행하고 있고,
다양한 월봉서원 교육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20180601_092116a[存省齋(존성재) 현판]

20180601_092103_HDR[서재 存省齋(존성재)]

월봉서원의 기숙사이다.
존성재의 존성은 ‘자기를 성찰한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180601_092153a[明誠齋(명성재) 현판]

20180601_092140_HDR[동재 明誠齋(명성재)]

월봉서원의 기숙사이다.
명선재의 명성은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성의를 다하라’
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180601_092202_HDR[廟庭碑(묘정비)와 빙월당 전경)]

묘정비는 월봉서원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연혁이나
관련 인물 등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20180601_092345_HDR[월봉서원 氷月堂(빙월당) 옆 전경]

월봉서원의 주강당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이다.
氷月(빙월)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氷心雪月(빙심설월)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가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20180601_092345_HDRa[현판과 주련]

월봉서원 현판은 李山裏(이산리)가 쓰고 빙월당은
宋浚吉(송준길)의 글씨인데 편액과 원현판은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SAM_2230a[月峯書院(월봉서원) 현판]

20180601_092934a[氷月堂(빙월당) 현판]

20180601_092959a[忠信堂(충신당) 현판]

20180601_092949-1[기고봉선생 편액 / 조순]

20180601_092949b[위 편액의 글 뜻 풀이]

20180601_092339_HDR[氷月堂(빙월당)과 굴뚝]

고봉 기대승은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본관 幸州(행주)이며 자 明彦(명언), 호 高峰(고봉) 시호 文憲(문헌)이다.

그는 문학가이자 철학자였으며 정치인이었다.
그는 퇴계와의 사단칠정을 비롯한 성리논변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넓혔고, 뒤에 다가오는 율곡 성리학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80601_092552_HDR[전사각]

사후에는 월봉서원에 배향되었고, 주요 저서로는
‘高峰集(고봉집)’, ‘朱子文錄(주자문록)’, ‘論思錄(논사록)’ 등이 있다.

20180601_092538_HDR[월봉서원 주강당 빙월당 옆 전경]

400년 전, 편지를 통한 아름다운 사상논쟁이 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은 13년 동안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8년은 사단칠정에 관한 학문적 논쟁을 펼쳤다.

처음 만나 편지왕래를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차는 무려 스물여섯이었다.
퇴계는 일가를 이룬 쉰여덟 살의 대학자로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에 있었고,
고봉은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 두살의 신출내기 선비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나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 논쟁을 뛰어 넘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치와 처세, 나가고 물러남의 이야기, 집안일까지
서로 이야기하는 끈끈한 인연이 이어졌다.

퇴계와 고봉이 했던 이 사상로맨스는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고 오늘날 진정한 토론과 교류에 관한 귀감이 되고 있다.

20180601_092629a[靜安門(정안문) 현판]

20180601_092606_HDR[내삼문 靜安門(정안문) 전경]

월봉서원의 내삼문으로 사당인 숭덕사 앞쪽에 세워져 있다.

고봉 기대승 선생을 모시는 사당에 들어가기 전
‘조용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20180601_092656[崇德祠(숭덕사) 전경]

고봉 기대승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20180601_092727_HDR[崇德祠(숭덕사)]

숭덕사는 문헌공 고봉 기대승을 재향하는 월봉서원
사당으로 매년 3월과 9월에 춘, 추향사제를 지내고 있다.

20180601_092746_HDR[정안문에서 내려다 본 월봉서원의 주 강당 氷月堂(빙월당)]

20180601_092858a[藏板閣(장판각) 현판]

20180601_092850_HDR[藏板閣(장판각)]

고봉선생 문집 11권의 판각 474매와 충신당. 명성재.
존성재. 유영루 등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20180601_092912_HDR[장판각쪽에서 담은 외삼문 전경]

20180601_093151[월봉서원 외삼문쪽에서 담은 입구쪽 전경]

20180601_093223_HDR[월봉서당 외삼문 앞쪽 敎育館(교육관) 전경]

월봉서원의 교육체험관으로 2011년도 완공되어 학이실, 예경실, 궁리실,
유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미나 및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6월 11일 at 8:39 오전

    깨끗이 관리가 잘 되어 있네요.
    요즘 아이들은 저런곳에서 각종 체험도 다 해보니 참 좋겠어요.
    우리들 어릴때와 많이 비교됩니다.

    투표는 하셨어요?

    • 초아

      2018년 6월 11일 at 8:36 오후

      앞으론 점점 더 좋아질건데요.
      요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그 아이들은 또 그때의 아이들을 부러워할거에요.
      우린 또 우리 윗 어르신님들이 보시면서
      참 좋겠구나 하실거에요.
      투표 아직입니다. 선거날 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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