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墓(묘)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20180601_093315_HDR[월봉서원 옆 고봉 기대승 묘소 가는 길 전경]

월봉서원을 둘러 본 후 서원 뒤편 백우산 자락에
모셔져 있는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20180601_093331_HDR[고봉 기대승 묘소 안내팻말]

안내팻말에는 고봉 기대승 묘소와 철학자의 길이란 글이 적혀 있다.

anigif[묘소 가는 길 애니메이션 편집]

길은 완만하고 좁은 산길이지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오르기가 쉽다.

20180601_094821[고봉 기대승 선생의 시비 전경]

오솔길의 풍광에 젖어 오르다 보니 어느새 앞쪽에
커다란 바위에 고봉 기대승 선생님의 시가 새겨진 詩碑(시비)가 보였다.

20180601_093824a[고봉 기대승 선생의 시비]

호와(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가마난,
백년(百年)이 못되어 무덤 우희 밧츨가니,
하물며 여나믄 장부(丈夫)야 닐러 무삼하리요.(高峯. 奇大升)

신릉군은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소왕의 아들로
식객 3000명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산 인물이다.
여나믄은 ‘다른’의 뜻이다.

‘그런 신릉군의 부귀와 권세도 백년 못가 무덤마저
전답이 되었는데 그만 못한 장부야 거론해 무엇하겠느냐’는 것이다.

부귀과 권세를 탐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윤형원, 이양과 같은 당시 외척 권신들에게
경종을 울려준 철학자다운 시조라 한다.

20180601_094006_HDR[정자]

詩碑(시비) 지나 조금 더 오르다가
이 정자가 보이면 정자 앞쪽 위쪽으로 묘소가 있다.

20180601_094020_HDR[쉼터(정자)]

정자 앞 안내팻말에는 귀전암, 칠송정, 월봉서원 가는길을 알려준다.
묘소 윗쪽으로 더 올라가야 있는 귀전암에는 들리지 못하였지만,
내려오는 길에 칠송정에는 들렸다.

20180601_094035_HDR[안내판과 고봉 묘소 전경]

20180601_094046a[안내판 고봉묘소 안내글 내용]

20180601_094112_HDR[고봉 기대승 묘소 전경]

전라남도 羅州(나주) 출신
본관 幸州(행주). 자 明彦(명언). 호 高峰(고봉) . 存齋(존재). 시호 文憲(문헌).

명종 4년(1549) 司馬試(사마시)를 거쳐,
1558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하고 史官(사관)이 되었다.

20180601_094312[좌측에서 담은 고봉 묘소 전경]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朱子大全(주자대전)’을 발췌하여
‘朱子文錄(주자문록)’ 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한다.

20180601_094328[좌측에서 담은 고봉 묘소]

1563년 賜暇讀書(사가독서)하고, 注書(주서)를 거쳐
司正(사정)으로 있을 때, 新進士類(신진사류)의 領袖(영수)로 지목되어
勳舊派(훈구파)에 의해 削職(삭직)되었다가, 명종 22년(1567) 복직되어
遠接使(원접사)의 從事官(종사관)이 되었다.

20180601_094303[좌측 문인석과 묘소]

32세에 李滉(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李恒(이항). 金麟厚(김인후) 등
호남의 碩儒(석유)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先學(선학)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20180601_094240[고봉 기대승 묘]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四端七情(사단칠정)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항상 퇴계선생을 대선배로 스승같이 존경하였고 따랐다

20180601_094507[구 묘비(앞면)]

벼슬을 그만 두기 전 선생은 그의 학문적 동지이자 스승이었던 이황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성품이 본래 우둔하여 세상일과는 뜻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은둔하려 하나 뒤에 남은 흔적을 감추기
어렵고, 애써 종사하자면 심신이 모두 피곤합니다. 두 가지 모두 힘들 바에는
차라리 속세를 떠나 저의 참된 뜻을 이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처세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저의 학문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제 학문이 지극하다면 처세하는 것도 반드시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20180601_094454[구 묘비(뒤면)]

이황은 답장을 써서 기대승을 말렸다.

“공은 뛰어난 재질을 지녀 출세하기도 전에 이름이 퍼졌고,
벼슬길에 나가자마자 온 나라의 시선이 다 공에게 쏠렸는데,
이제 막 장도에 올라 은둔하려 한다면 사람들이 쾌히 놓아주려 하겠는가?”

20180601_094220[신 묘비]

고봉선생은 결국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古阜(고부)에서 병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20180601_094235_HDR[우측 문인석]

20180601_094248[좌측 문인석]

20180601_094144[우측에서 담은 묘소 전경]

이 四七理氣論(사칠이기론)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 2권에 남아 있다.

20180601_094204[우측 문인석과 묘소 전경]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선조 23년(1590) 생전에
宗系辨誣(종계변무)의 奏文(주문)을 쓴 공으로 光國功臣三等(광국공신 3등)에
追錄(추록)되었고 德原君(덕원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光州(광주)의
月峰書院(월봉서원)에 配享(배향)되었다.

20180601_094412[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주요저서에는 ‘高峰集(고봉집)’.  
‘朱子文錄(주자문록)’.  ‘論思錄(논사록)’ 등이 있다.

20180601_094551_HDR[묘소 아래쪽에 핀 엉겅퀴]

20180601_094801[시비와 쉼터(의자) 오솔길 전경]

퇴계 이황이 ‘당신이 나보다 한 수 위다’라고 칭찬한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은
기억하지만 그와 쌍벽을 이뤘던 고봉 기대승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경상도에 퇴계가 있었다면 전라도에는 고봉이 계셨다.
퇴계선생과 함께 고봉 기대승도 기억해 우리에게 훌륭하신
선조님이 계셨다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1 Comment

  1. 데레사

    2018년 6월 12일 at 8:40 오전

    갑자기 광주가 가고싶어 졌습니다.
    언니가 바깥출입을 못하는지가 꽤 되었고 광주에 살아요.
    작년 형부 돌아가셨을 때 다녀오고는 못가서 형부 1주기에 맞춰서
    가볼려고요.
    광주에 가도 누가 차 태워주지 않으면 다니지도 못할거고 언니
    얼굴이나 보고 와야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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