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敬命(고경명) 墓域(묘역)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

20180601_141321[제실 옆 아래쪽에서 담은 高敬命(고경명) 墓域(묘역) 젼경]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에는 제봉 고경명 장군의 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장군의 호에서 따온 제봉산이 평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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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은 장군의 연고지가 아닌데 어째서 이곳에 묘가 있는 것일까?
전해지기로는 원래 장군의 묘는 화순군 흑토평에 있었는데 임금께 받은
사패지가 장성에 있었고, 현재 묘가 있는곳의 자리가 좋다하여 이장하였다 합니다.

20180601_140340[高敬命(고경명) 墓域(묘역) 전경]

霽峯山(제봉산) 아래 墓域(묘역) 우측 맨 위쪽에는
제봉 고경명과 부인 울산김씨 부부묘.
아래쪽에는 여섯째 아들인 고용후와 부인 행주기씨 부부묘.
좌측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첫째 아들 고종후의 부인 철성이씨의 묘가 있다.

20180601_140420[고종후의 부인 철성이씨 묘와 뒤쪽 고경명 부부 묘 전경]

20180601_140431[高從厚(고종후) 부인 鐵城李氏(철성이씨) 墓(묘)]

高從厚(고종후) 자. 道冲(도충), 호 隼峰(준봉).
형조좌랑 高雲(고운)의 증손. 할아버지는 참의 高孟英(고맹영).
아버지는 의병장 高敬命(고경명). 어머니는 金百鈞(김백균)의 딸이다.

20180601_140444_HDR[墓碑(묘비)]

선조 3년(1570)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高因厚(고인후)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해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광주목사 丁允佑(정윤우)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 김제. 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

이 때 왜적이 황간. 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郭嶸(곽영)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했다.

20180601_140448[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復讐義兵軍(복수의병군)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대군으로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李宗仁(이종인),
창의사 金千鎰(김천일), 충청병사 黃進(황진), 경상병사 崔慶會(최경회)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다.

20180601_140451[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徐禮元(서예원)이 적의 대공세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는데,
이들 세 사람을 ‘三壯士(삼장사)’라고 불렀다.

20180601_140543[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도승지에 이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褒忠祠(포충사)와 진주의 忠愍祠(충민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孝烈(효열)이다.

20180601_140507[고경명 묘와 墓表文(모포문) 전경]

광주 鴨保村(압보촌) 출생.
중종 28년(1533)~선조 25년(1592).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본관 長興(장흥). 자 而順(이순), 호 霽峰(제봉). 苔軒(태헌).

自儉(자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雲(운).
아버지는 대사간 孟英(맹영), 어머니는 진사 徐傑(서걸)의 딸이다.

슬하에 자녀는 高從厚(고종후), 高因厚(고인후), 髙由厚(고유후), 高用厚(고용후)이다.

20180601_140525a[墓表文(모포문) 글 내용]

20180601_140512[우측 옆에서 담은 霽峯(제봉) 高敬命(고경명) 墓(묘) 전경]

조선조에 의병대장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 제봉 고경명 집안이다.
난리가 나자 60세의 나이로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제봉이 수천명의 의병을 소집하였던 명문장이 ‘마상격문’으로 전해진다.

제1차 금산성전투는 선조 25년(1592)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의병장 高敬命(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이 연합하여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전투이다.

20180601_140534[霽峯(제봉) 高敬命(고경명) 墓(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을 위해 서울을 향하다가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당초 계획을 바꾸어
왜군을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하고, 진산에 진을 치고 있는 전라도방어사
곽영과 왜군을 관군·의병의 연합작전으로 공격하자고 합의하였다.

20180601_140608[墓碑(묘비)]

현재의 비는 1791년 종손 고시숙이 바꿔 세운비라고 합니다.

20180601_140553_HDR[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20180601_140602[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20180601_140639[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마침내 임진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에 걸쳐 의병장 고경명이
7,000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성을
탈환하고자 했으나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고경명은
금산 눈벌(臥隱坪)에서 전사하였다.

20180601_140824[高用厚(고용후) 부부 墓(묘)]

高用厚(고용후)자. 善行(선행), 호 晴沙(청사)
형조좌랑 高雲(고운)의 증손. 할아버지는 참의 高孟英(고맹영).
아버지는 의병장 高敬命(고경명). 어머니는 金百鈞(김백균)의 딸이다.

20180601_140811[墓碑(묘비)]

선조 38년(160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병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광해군 8년(1616)
남원부사가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20180601_140800_HDR[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20180601_140805[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20180601_140726[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判決事(판결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청사집’, ‘正氣錄(정기록)’ 등이 있다.

20180601_140224[아래쪽에서 담은 묘역 전경]

20180601_140940[묘역에서 담은 제실 전경]

20180601_141150[묘역 아래쪽 제실 출입문]

20180601_141206_HDR[좌측 옆에서 담은 제실 霽峰閣(제봉각)]

20180601_141243a[霽峰閣(제봉각) 현판]

20180601_141226_HDR[霽峰閣(제봉각)]

霽峯閣(제봉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霽峯(제봉) 高敬命(고경명, 1533~1592)의
생애와 행적을 기르기 위해 세워진 제각이다.

20180601_141251_HDR[霽峰閣(제봉각) 삼문]

임진왜란은 조선의 전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의병과 승병,
관군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구국충절의 전쟁영웅들을
많이 탄생시켰다.

선비로 하여금 칼을 들게 했고 살생을 금하는 승려들까지
창검을 들었는데 금산성전투에서 순절한 영웅은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의승장 영규대사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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