密陽(밀양) 惠山書院(혜산서원)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607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20180811_135405[혜산서원 가는 길 전경]

다죽리 손씨 고가와 연극인 손숙님의 유년시절의
고가를 둘러본 후 골목길을 따라 혜산서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20180811_135417[서원가는 골목길 옆 돌담 전경]

일직 손 씨의 집성촌이기도 한 다원 마을은 마을 곳곳에 흙과 돌로
쌓은 담장과 높은 대문으로 된 고택의 기와지붕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마을의 중심에 혜산서원이 있다.

20180811_135456[혜산서원 입구쪽 안내판 전경]

수령 600년이 넘은 차나무가 있는 茶香(다향)의 고장이다.
서원 지킴이 소나무가 선비정신을 함양하며 민족의 기개를 상징한다

20180811_135504a[안내판 글 내용]

20180811_135620[혜산서원 입구에서 담은 서원 외삼문]

서원 입구 양쪽으로 웅장한 고목이 된 소나무가
용트림하는 듯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서원을 보호하기 위해
사열하듯 자리하고 있었다.

20180811_135643[좌측 전사청 출입문 전경]

20180811_135645[우측 서원 출입문 전경]

서원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에는 전사청 출입문
우측에는 혜산서원 출입문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우선 서원부터 들리기로 하고 우측 출입문으로 들어섰습니다.

20180811_135747_HDR[惠山書院(혜산서원) 전경]

산외면 다죽리 竹西(죽서) 마을에 世居(세거) 하는 一直(일직) 孫氏(손 씨)
5賢(현)을 받드는 서원으로 본래는 1753년(영조 29)에 창건한 孫肇瑞(손조서)의
西山書院(서산서원)이 있던 자리이다.

20180811_135811a[惠山書院(혜산서원) 현판]

20180811_135741_HDR[惠山書院(혜산서원)과 앞쪽 차나무 전경]

혜산서원 앞 차 나무는 손조서의 부친 손관께서
안동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수령 600년 차 나무라 미리 알아보고
들렸는데,….

한때 일직 손 씨 밀양 입향조인 손광공이 진성 현감 시절에
진성(현재 산청군 단성면)에서 차 나무를 가져와 식수했고,
현재 600년이 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최근 마을 어른들이
600년이 되지 않았다며 설명을 떼버렸다고 한다.

20180811_135820[혜산서원 내부]

1971년 惠山書院(혜산서원)으로 개칭하고 다른 4현을 모시던
4개 서원을 이곳으로 함께 옮겨와 孫洪亮(손공량). 孫處訥(손처눌).
孫?(손린). 孫宇男(손우남)의 四位(사위)를 追享(추향)하였다.

20180811_135823[서원 내부 편액]

西山書院(서산서원)은 영조 29년(1753) 창건되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를 피하기 위해
西山古宅(서산 고택)’이나 徹雲齋(철운재)’로 편액 하여 주택이나
재실로 위장하여 명맥을 이어왔다.

20180811_135827[서원 내부 편액 등]

이곳으로 이건 된 4개 서원은
孫洪亮(손홍량)을 모시던 안동의 陀陽書院(타양서원),
孫處訥(손처눌). 孫?(손린)을 각각 모시던 대구의 靑湖書院(청호서원)과
鳳山書院(봉산서원), 孫宇男(손우남)을 모시던 영천의 立巖書院(입암서원)이다.

20180811_135830[서원 내부 좌측 전경]

면적은 1,300여 평이며 경내에는 祠宇(사우), 강당,
東齋(동재), 西齋(서재), 尙禮門(상례문), 神門(신문), 中門(중문),
展祀堂(전사당), 神道碑閣(신도비각), 茶院書堂(다원서당) 등
13동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20180811_135834[서원 내부 우측 전경]

서원은 교육 시설과 제례 시설이 일직선으로
구성되나 혜산서원은 밭 田(전) 구조로 되어 있다.
서원철폐를 피하기 위해 주택이나 제실로 위장하기 위해서라 한다.

20180811_135756_HDR[서원 앞쪽 東西齋(동서재)]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마주 보는
건물을 짓고 각각 東齋(동재) 西齋(서재)라고 불렀다.

성균관의 경우 강학을 하는 명륜당의 좌우에 東齋(동재) 西齋(서재)를
두고,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를 수용했다.

20180811_135803[서원 앞쪽 東西齋(동서재)]

후기에 당쟁이 심해지자 당색에 따라
東(동). 西(서)로 학생을 나누어 수용한 적도 있었다.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에도 東齋(동재) 西齋(서재)가 있었다.
동재는 양반 자제가, 서재는 평민 자제가 많이 기숙했다.

20180811_135943_HDR[혜산서원 앞쪽 출입문 옆으로 난 협문]

협문이 활짝 열려 있기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더니,
앞쪽 열린 건물 대청에는 어르신님들이 담소를 나누며 쉬고 계셨다.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등 소리를 높여보았지만,
담소하시느라 듣기 지 않는지 기척이 없다.
갑자기 사오정이 된 기분… ㅠ.ㅠ

어르신님들의 망중한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궁금함을 뒤로하고 되돌아 나왔다.

20180811_135947[전사청 출입문 전경]

앞쪽에 보이는 작은 쪽문이 궁금하였지만,
닫혀 있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다녀와서 알아 본 결과
신도 비각 쪽으로 통하는 쪽문이었다.

20180811_140040_HDR[출입문 쪽에서 담은 典祀廳(전사청) 전경]

향교나 서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보통의 전사청과는 달리
이곳의 전사청은 건물도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는 터도 아주 넓다.

서원 철폐령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를 넓게 잡아 건물을 옮겨 지은듯하다.

20180811_140038_HDR[典祀廳(전사청)]

제사 업무를 맡아 수행하는 건물이다.

20180811_140124[서원 외삼문 쪽에서 담은 서원 입구 쪽 전경]

혜산서원이 있는 동네는 차나무 밭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다원’이라 이름 붙었지만 현재는 차를 재배하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해마다 많은 사림이 모여 향사를 지낸다.
孫肇瑞(손조서)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수양대군의
癸酉靖難(계유정난)에 분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8월 24일 at 12:34 오후

    서원 보다도 마을 골목길이 정답게 느껴 집니다.
    저 길 모퉁이를 돌아가면 내가 자라던 옛 고향집이
    있을것만 같아서요. ㅎ

    • 초아

      2018년 8월 25일 at 5:33 오전

      저도 그랬어요.
      골목길이 마음에 꼭 들었어요.
      무언가 그리움이 물씬 전해져 오는듯 하였어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