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軒(여헌) 張顯光(장현광) 선생 묘역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산 23-1

20181008_133917[여헌 장현광 선생 묘소 안내 팻말]

영남 출신으로 조선의 성리학자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旅軒(여헌) 張顯光(장현광) 선생
16세기 조선 성리 학계에 퇴계와 남명, 율곡이 있다면 17세기에는 여헌을 꼽는다.

20181008_133929[여헌 장현광 선생 유허비 와 뒤쪽 묘소로 가는 산길 전경]

張顯光(장현광, 1554~1637)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 仁同(인동), 자 德晦(덕회), 호 旅軒(여헌)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張烈(장열)이며, 어머니는
京山李氏(경산 이씨)로 齊陵參奉(제릉 참봉) 李彭錫(이팽석)의 딸이다.

위 사진 속 뒤쪽으로 난 산길을 좀 더 오르면 선생의 묘역으로 갈 수 있다.

20181008_133942_HDR[여헌 장현광 선생 유허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李滉(이황)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柳成龍(류성룡)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중에서 赴任(부임) 한 것은 報恩縣監(보은 현감)과
義城縣令(의성 현령)의 외직과 內職(내직)으로는 工曹佐郞(공조 좌랑),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 刑曹參判(형조참판), 의정부 우참찬 등이다.

선조 35년(1602)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周易(주역)
교정 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 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하였다.

20181008_132418_HDR[여헌 장현광 선생 묘역 전경]

7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8세 때 아버지 장열을 잃었다.
9세 때 매형인 송암 노수성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1세 때 학자인
新堂 鄭鵬(신당 정붕)의 아들인 정각은 그를 보고
“이 아이는 기상이 宏偉(굉위)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20181008_132539_HDR[여헌 장현광 선생 묘 와 묘비 전경]

23세 때 才士(재사)로 추천되었으며 26세 때에는 한강 정구의
조카딸과 결혼, 질서가 되어 한강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그때
성주목사로 있던 허잠이 그의 문하에 찾아와 수학한다.

허잠이 한강 정구에게 묻기를
“남방에서 호학하는 선비가 누구입니까”하니
한강은 장현광을 추천했는데 허잠은
“호학 입지를 보아 이 사람이 훗날 나의 사표가 될 만하다”하였다고 한다.

그의 문인 허잠은 훗날 영의정을 지내는 허적의 할아버지로 그를 통해 허적 등에게도 영향을 준다.

20181008_132654_HDR[墓碑(묘비)]

묘 앞 묘비에 새겨진 글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유명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
府領議政兼領經?弘文官藝文官春秋(부영의정겸령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
館觀象監事世子師行資憲大夫議政府(관관상감사세자사행자헌대부의정부)
右參贊諡 文康公旅軒張先生之墓 (우참찬시문강공여헌장선생지묘)

20181008_132633[우측 문인석]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와 음식, 군자 물품을 모아 보냈다.

20181008_132641[좌측 문인석]

그러나 이듬해 2월 三田渡(삼전도)에서 왕이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탄식하기를 “하늘도 땅도 없으니 가면 어디로 가랴”
하며 크게 통탄해했다 한다.

20181008_132501[좌측 옆에서 담은 여헌 장현광 선생 묘]

이후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永川(영천) 立?山(입암산)으로 들어가
고요히 몸을 닦으며 12목의 벽서와 소강절의 西書今(서서금)을 쓰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0181008_132917[여헌 장현광 선생 묘]

만욱제에서 영면하니 전날 밤에 우뢰가 크게 울리고
비가 퍼부어 산이 무너지고 개울이 넘쳤다고 한다.

20181008_132547_HDR[전체 전경으로 담은 여헌 장현광 선생 묘역 전경]

인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보내 이르기를 500년에 성현이 한 분씩 난다 드니
그대가 바로 동방의 큰 그릇이요 천지의 오묘함을 연구하고 체득하여 통달한 분이라”
하며 애통해 하였다.

享祀(향사)는 매년 춘추(2月中丁. 8월末丁)로 봉행한다.
선산은 오태동에 있는데 시재는 음력 10월 10일 올린다.

20181008_132601[우측 아래쪽 옆에서 담은 여헌 장현광 선생 묘역 전경]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20181008_132816_HDR[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문집으로 ‘여헌 집’ 11권이 있고 ‘속집’ 5권, ‘性理說(성리설)’ 6권
‘易學圖說(역학도설)’ 9권, ‘龍蛇日記(용사일기)’ 2권 등의 저서가 있다.

20181008_132837[묘 뒤에서 담은 여헌 장현광 선생 묘역 전경]

선산의 旅軒影堂(여헌 영당), 영천 입암서원, 선산 금오서원, 의성의 氷溪書院(빙계 서원),
성주의 川谷書院(천곡 서원), 영천의 臨皐書院(임고서원), 성주 천곡 서원,
인동의 同洛書院(동락 서원), 청송의 松鶴書院(송학 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20181008_132359_HDR[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다시 담은 묘역 전경]

효종 6년(1655) 경연관 오준이 청하여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다시 1657년 경연관 오정위가 청하여 증직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加贈(가증) 되었다.

시호는 文康(문강)이다.

20181008_134001[노랑나비]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유허비를 담기 위해 잠시 머물다
돌아오려는데 풀숲에 뭔가 노란 핀 같은 게 보였다. 뭘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노랑나비 2마리였다.

20181008_134009[노랑나비 밀월 중]

밀원 중 신혼의 단꿈을 나누느라 가까이 다가가도 모르네요. ㅎ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뒷걸음으로 물러나 돌아왔습니다.^^

 

4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10월 26일 at 8:04 오전

    요즘 다니시기에 날씨가 참좋지요?
    나비도 참내…
    노랑나비 본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기는
    올 가을에는 고추 잠자리도 못봤어요.

    • 초아

      2018년 10월 26일 at 9:33 오후

      다니긴 좋지만, 조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경기도 광주쪽으로 가자 약속하였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그냥 주저 앉았습니다.
      훗… 나비에게 혼날까봐 두렵습니다.
      밀월을 담아 올렸다고 행여 초상권 운운할까봐서요. ㅋ
      올해는 저도 노랑나비는 이번이 처음
      잠자리는 한달 전쯤 두어마리 그리곤 끝.

  2. 비풍초

    2018년 10월 27일 at 9:35 오후

    관직을 사양하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아버지, 할아버지로 부터의 재산이 많았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양반도 행세하려면 재산이 있어야하는데말이죠.. 임진왜란때 무사히 살아남아 장수한 것도 대단합니다 ^^

    • 초아

      2018년 10월 29일 at 5:40 오전

      그런면도 있겠지만, 관직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쉬운가요. 힘들죠.
      요즘 세태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관직과 재물 둘다 가지려다 패가망신하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지요.
      관직에 연연하지 않은 그 옳곧은 마음을 우러러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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