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同鄕校(인동 향교)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409-3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4호

20181012_150541_HDR[인동 향교 안내 팻말과 향교로 오르는 돌계단 전경]

20181012_145706a[안내판 글 내용]

20181012_145706b[안내판 영문 글 내용]

20181012_145716_HDR[돌계단 아래쪽에서 담은 외삼문 전경]

구미에는 선산 향교와 인동 향교가 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 큰 고을이었던, 선산과 인동을
합쳐서 현대 시기에 구미라는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로, 구미에는 향교가 2개씩이나 보존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는 구미 선기동에 옛 선주의 관아가 있어서 선기동에
향교도 있었으며, 비산동에도 향교가 있었던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20181012_145732_HDR[돌계단을 올라와서 담은 인동 향교 전경]

인동 향교는 인동 도호부에 설치된 조선시대의 공립 지방 교육기관으로,
공양왕 2년(1390) 황상동 어운산 밑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자 선조 34년(1601)
안태동 옥산으로 이건하였다.

20181012_145826인동 향교 사무소와 좌측 옆 여러 종류의 선정비 전경]

그곳 지반이 무너져 붕괴 위기에 처하자 인조 12년(1634)
경상도관찰사 이기조가 상소하여 인의동으로 이건하였고
1988년 임수동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20181012_145820_HDR[현감 유운용 선정비 와 인동 향교 사무소 전경]

1635년에 대성전에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본래 공자를 비롯하여
안영. 증자. 자사. 맹자의 5성과 공문십철, 宋(송)의 6 현, 한국 18현을
배향하였으나 지금은 5성과 송의 2 현, 한국의 18현만을 모시고 있다.

20181012_145748[縣監柳雲龍善政碑(현감 유운용 선정비)]

본관 豊山(풍산)이며, 자 應見(응견), 호 謙菴(겸암)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柳成龍(유성룡)의 형으로
퇴계 李滉(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經史(경사)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20181012_145800a[縣監柳雲龍善政碑(현감 유운용 선정비)]

선조 18년(1585) 인동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조 23년(1590)에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백성들에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야은 길재와
관련하여 오산 서원과 지주 중류비를 세우는 등 특히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20181012_145756_HDR[여헌 장현광의 현감 류 후 운룡 선정비 추모글]

20181012_145835_HDR[인동 향교 사무소]

인동 향교 사무소 일각문 좌우에는
仁同鄕校 事務所(인동 향교 사무소)
成均館儒道會 慶尙北道 龜尾支部(성균관유도회 경상북도 구미지부) 라
기둥에 간판이 붙어 있네요.

20181012_145840[인동 향교 사무소와 향교 담장 아래의 여러 종류의 선정비 전경]

인동 각지에 산재해 있던 역대 현감과 부사의 선정비, 불망비, 거사비
등의 비석을 옮겨와 인동 향교 담아래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합니다.

어떤 사연의 碑(비) 일까요?
함께 알아보실래요.

20181012_145852a[府使李侯義培淸德善政碑(부사 이 후 의배 청덕 선정비)]

李義培(이의배, 1576~1637) 조선 후기의 무신.
자 宜伯(의백) 시호 忠壯(충장)이다.

이의배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한 무신으로서,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靖社功臣(정사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인조 4년(1626)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인조 5년(1627) 1월에
신병으로 遞任(체임) 하였다.

그는 인동 부사로 있으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며,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20181012_145857a[府使姜侯鎬淸謹遺愛碑(부사 강 후 호 청근 유애비)]

姜鎬(강호, 1605∼1667년) 자 京叔(경숙),

효종 7년(1656년)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효종 8년(1657년)
弼善(필선)으로 승배 되어 떠났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의 선정을 기려 주민들이 비를 세웠다.

20181012_145902a[府使柳侯浩源興學善政碑(부사 유 후 호원 흥학 선정비)]

유호원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 순조 26년(1826)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순조 30년(1830) 암행어사의 書啓(서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인동 부사로 있었으며,
재직 중에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려 비를 세웠다.

그의 선정비가 임기 중에 세워져 있어,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과연 그의 선정비가 백성들의 자발적인 뜻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인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옮겨 적은 글)

20181012_145907a[府使鄭侯沃永世不忘碑(부사 정 후 옥 영세불망비)]

정옥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인동 부사의 도임 및 이임의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그는 인동 부사로 재임하면서 백성들이 제때 내지 못하여 누적된
조세를 면제, 또는 감면해서 민생고를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20181012_145913a[金侯應祖去思碑(김 후 응조 거사비)]

김응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인조 18년(1640)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인조 20년(1642)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 부사로 있으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며, 백성들이 이를 기려서 선정비를 세웠다.

김응조 거사비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공직자 상을 생각하게 한다

20181012_145919a[府使鄭侯弘采愛民碑(부사 정 후 홍채 애민비)]

정홍채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고종 15년(1878)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고종 19년(1882)에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 부사로 재임하면서 특히 백성들을 애정으로서 보살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20181012_145923a[觀察使李相國坦善政永世不忘碑(관찰사 이 상국 탄 선정 영세불망비)]

인터넷 검색으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다시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통과합니다.

20181012_145932[인동 향교이건 준공비(1988. 9. 9)

20181012_145944[향교 외삼문 우측 여러 종류의 碑(비) 전경]

20181012_150005a[鄕校(향교) 현판]

20181012_145953_HDR[鄕校(향교) 외삼문 전경]

인동 향교 외삼문도 굳게 닫혀 근접을 못하게 한다.
행여, 틈새로라도 볼 수 있을까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한다.

인기척은 없고, 혼자서 이곳저곳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다.

20181012_150059[향교 좌측 담장 앞쪽 여러 종류의 선정비 정면 전경]

아쉬운 마음 선정비를 한기 한기씩 담아본다.
담아 온 역대 현감과 부사의 선정비, 불망비, 거사비를 소개합니다.

20181012_150110a[府使李侯敎駿永世不忘碑(부사 이 후 교준 영세불망비)]

이교준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 고종 8년(1871)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고종 12년(1875)에 이임하였다.

그는 4년 동안 인동부사로 있으면서 都目政(도목정)에 따라 이배되었으며,
백성들이 인동부사로서 베푼 선정을 기려 2기의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20181012_150113a[府使鄭侯熽永世不忘碑(부사 정 후 소 영세불망비)]

鄭熽(정소)는 무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헌종 9년(1843)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헌종 11년(1845)
都目政(도목정)에 따라 승진하여 이임하였다.

그가 재임 기간 동안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20181012_150117a[府使韓侯弘烈興學善政碑(부사 한 후 홍열 흥학 선정비)]

한홍열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고종 4년(1867)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고종 7년(1870)
都目政(도목정)에 따라 승진하여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 부사로 재임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20181012_150122a[府使鄭侯雲岐興學善政碑(부사 정 후 운기 흥학 선정비)]

정운기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철종 2년(1851)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철종 6년(1855)에
都目政(도목정)에 따라 승진하여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 부사로 재임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1855년 6월에 있은 都政(도정; 근무 평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京畿中軍(경기 중군)으로 승진되었다.

20181012_150125a[繡衣李公萬植永世不忘碑(수의 이 공 만식 영세불망비)]

고종 18년(1879) 경상좌도 암행어사로서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仁同府(연동부)의 민폐를 시정하고 조세를 감면하는 등
백성들의 애로 사항을 덜어주는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이후 1884년 성균관대사성, 1885년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20181012_150129a[府使李侯敎駿永世不忘碑(부사 이 후 교준 영세불망비)]

이교준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 고종 8년(1871)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고종 12년(1875) 이임하였다.

그는 4년 동안 인동 부사로 있으면서 都目政(에 따라 이배되었으며,
백성들이 인동 부사로서 베푼 선정을 기려 2기의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20181012_150135a[府使元侯世去思碑(부사 원 후 세정 거사비)]

원세정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 철종 6년(1855)
인동 부사로 부임하여 철종 10년(1859) 이임하였다.

그는 4년 동안 인동 부사로 있으면서 都目政(도목정))에 따라
승진하였으며, 백성들이 인동 부사로서 베푼 선정을 기려 비를 세웠다.

원세정 거사비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공직자 상을 생각하게 한다.

20181012_150148_HDR[좌측에서 담은 향교 외삼문 과 여러 종류의 碑(비) 전경]

碑(비)를 다 담고 보니 향교 내부를 둘러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워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더니 비 앞쪽 앝은 둔덕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보였다.

20181012_150328[돌계단]

지나칠 수 없지요.
돌계단을 올랐다.

20181012_150216_HDR[둔덕 위에서 담은 인동 향교 전경]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다 우거진 수풀 길은 거기서 끝나고
향교 담너머로 보이는 인동 향교 내부를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20181012_150220_HDR[줌으로 당겨 담아 본 향교 전경]

고종 말기에는 인동 국민학교의 전신인
玉城學院(옥성 학원)이  설립되어 명륜당을 교사로 쓰기도 하였다.

東廡(동무). 西廡(서무)는 6.25 때 소실되었고
東齋(동재). 西齋(서재)도 그 뒤 철거되어 서재 자리에 管理舍(관리사)를 지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神道門(신도문). 外三門(외삼문) 등이 있다.

20181012_150228_HDR[뒤쪽 외삼문 너머 대성전]

대성전에는 五聖(5성), 宋朝二賢(송조 2 현),
우리나라 十八賢(18 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20181012_150257_HDR[둔덕 위에서 담은 인동 향교 사무소 전경]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釋奠(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20181012_150419_HDR[향교 외삼문 옆 우측 담너머로 담은 명륜당 전경]

명륜당은 初翼工五樑架(초익공 오량가)이며 工(공) 자형
지붕을 하고 있어 명륜당 건물로서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의 운영은 典校(전교) 1명과 掌議(장의)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20181012_150459_HDR[향교 돌계단에서 담은 앞쪽 전경]

인동 향교와 선산 향교에서 공자를 비롯한 25현을 추모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한 추계 釋奠大祭(석전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釋奠大祭(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初丁日(초정일)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지방 향교에서 先聖先賢(선성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제사의식이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11월 5일 at 7:56 오전

    돌아가신 울 엄마가 인동장씨 였는데
    여기 인동이 맞을까요?
    인동이라는 단어에 엄마생각이 나요.

    향교에서는 지금도 행사가 많더라구요.
    나는 언제나 그냥 슬쩍 지나치기만…
    초아님덕에 많은걸 배워요.

    • 초아

      2018년 11월 5일 at 8:59 오후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인동장씨셨다면 이곳 인동이 맞을것 같습니다.
      요즘은 향교에서도 활발하게 주민들을 위해
      교육도 하고 장소 제공도 하며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지나치는 곳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될수 있으면 들려보자
      아니 들려보자가 아니라 꼭 들리자로 바뀌었습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