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독립유공자 최준 선생 생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20190126_130803[입구쪽에서 담은 최부자집(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전경]

20190126_131709[최부자집 솟을대문 우측 옆 안내판 전경]

20190126_130835a[경주 최부자댁 안내판 글 내용]

20190126_130839a[독립유공자 최준 선생 생가 안내판 글 내용]

20190126_130847a[관람시간 안내]

20190126_130847[최부자집 솟을 대문]

솟을대문 형식을 취했으나 화려하지 않으며
수수하고 평범한 최부자댁 대문. 일반적인 솟을대문보다
낮게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 전경을 담아보려 하였지만, 한무리의 관광객들이 오래도록
머물고 있어서 우선 내부부터 둘러본 후 나오면서 담아야지 해놓고는 잊었다…ㅠ.ㅠ

20190126_130917[대문안 좌측 경주 최부자집(중요민속자료 제 27호) 설명 글]

20190126_131459[작은 사랑채 터]

불에 탄 작은 사랑채터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주춧돌은 집을 지을 당시 반월성에 있던 왕궁기둥을
받치던 돌들을 옮겨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90126_130902[삼문쪽에서 담은 최부자집(사랑채) 전경]

2006년 복원.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면암 최익현,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의친왕 이강공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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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댁은 건축 당시 향교 유림들의 뜻을 수용하여
향교보다 2단계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합니다.

이 중 사랑채는 화재로 불탔으나 최근 큰 사랑채를
복원하였고, 작은 사랑채는 주춧돌만 남아 있는 상태다.

20190126_130927[明燎臺(명료대)]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채의 밤을 밝게 비추는 역활을 하였다 하네요.

20190126_130927a[明燎臺(명료대) 뒤쪽 구멍?]

명료대 뒤 아랫쪽 뚫어진 저 구멍이 굴뚝이라 합니다.
보통의 굴뚝은 지붕위로 세워져 있는데, 이곳 최부자댁의 굴뚝이
왜 마루 밑 석축아래에 만들었을까요?

이것 역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겸손의 마음갖임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흉년이 들거나, 끼니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밥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것이라 합니다.

다음은 사랑채에 붙어 있는 현판을 소개합니다.

20190126_131003[龍庵古宅(용암고택) 현판]

‘용의 정기가 스며드는 집’ 이란 뜻으로 경주 최부자 8대손인 최기영의 호라 합니다.

20190126_131009[大愚軒(대우헌) 현판]

크게 어리석다는 뜻이라 하지만
진정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은 것을 모르죠.
자신은 낮출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君子(군자)가 이겠지요.

20190126_131015[鈍次(둔차) 현판]

재주가 둔하다는 뜻.
위의 大愚軒(대우헌) 현판의 뜻처럼 최부자댁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배여 있는듯 합니다.

20190126_131022[옆에서담은 明燎臺(명료대) 전경]

이 가옥은 慶州崔氏(경주 최씨)의 고택으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았고,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ㅡ’자 모양이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처 進士(진사)를 배출하였다 한다.

20190126_131049[사랑채 우측 대청]

鈍次(둔차) 현판 이 붙여 있는 우측 사랑채 대청

20190126_130912[사랑채 쪽에서 담은 곳간]

최부잣집은 조선조 최진립이 시조인 경주 최씨 가문이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간 富(부)를 이어온 것을 의미한다.

12대로 대대손손 가훈을 지켜가며 富(부)를 쌓았고,
나그네나 거지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밥을 먹여주는 선행을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주의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부잣집의 시조는 최진립이다.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에도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위도총부도사, 공조 참판, 삼도 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20190126_131119[곳간 전경]

최부자댁에서 가장 눈여거 볼 창고로 현존하는 목재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 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 한옥으로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90126_131201[곳간 앞쪽 작은 쌀통]

20190126_131201a[경주 최부잣집 작은 쌀통 이야기 내용]

20190126_131145[곳간쪽에서 담은 사랑채와 안채 문간체 전경]

최진립은, 아들 최동량을 교육시켜 최동량이 최부잣집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한편 최동량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여생을 살던 최진립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큰 땅을 구입했다.
산부터 강까지 이르는 큰 땅을 산 후, 여기 전체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아들 최국선은 둑을 세우고 옆에서 도우며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20190126_131215a[최부자집의 六訓(육훈)]

20190126_131228[안채 대문]

우리 말에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경주의 최 부잣집은 3대가 아니라 10대에 걸쳐 부를 이어왔으며,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메디치가에 비해서도 100년이나
더 오랫동안 부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20190126_131237[안채 전경]

명당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명당엔 양택과 음택이 있다고 합니다.
음택은 묏자리인데 좋은 자리를 잡으면 여러 대까지 복이 이어지지만, 집터를 가리키는
양택은 보통 당대에 끝이 난다고 하지요.

20190126_131306[안채 우측 전경]

그러나 양택일지라도 복이 여러 대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덕을 베푸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합니다.

20190126_131318[안채 좌즉에서 담은 전경]

1914년 9월 부산시 중앙동에 백산상회가 설립되었다.
사장은 경주 최 부자의 자손인 최 준이 맡았고 주주는 182명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무역업이었으나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이며
실체는 독립운동자금의 모집과 지원이었다.

20190126_131333[안채 대청]

처음 설립을 제안한 것은 백산 안희제로서 그의 호를 따서
상호를 지었으며, 임시정부로의 자금 전달 경로는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최준 그도 사람인지라 매번 돈을 건네주면서 절반만이라도
옳게 전달되었으면 하고 이따금씩 백산을 의심하였다 한다.

20190126_131349[우측에서 담은 안채 전경]

해방 뒤 고국에 돌아온 상해 임시정부 수반 김구 주석은
최준에게 감사의 뜻과 함께 그동안의 자금명세기록을 공개하였는데,
최준의 장부와 백범의 장부가 완전히 일치하였다.

최준은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 이미 유명을 달리한
백산이 묻힌 곳을 향해 큰 절을 올리면서 목 놓아 울었다 합니다.

20190126_131352[안쪽에서 담은 안채 전경]

이 같은 철저한 배려와 나눔은 구한말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떼로 변해 스스로를 의적이라고 부르며 조선8도의 부잣집을
약탈하는 등 부자들이 수난을 겪을 때 오히려 최부잣집은 그들이
호위하며 지켜주었다고 한다.

20190126_131141[곳간쪽에서 담은 행랑채 전경]

경주 최부잣집은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에 걸쳐 부를 누렸지만 나라가 망하자
마지막 최부자 최준(1884∼1970)은 재산을 정리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나라를 되찾는데 쓰라며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20190126_131440[행랑채 전경]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師表(사표)이다.
‘청구대’ ‘대구대학’ 설립에 쏟아 부은 후 스스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지금은 집도 후손들의 소유가 아닌 영남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록 만석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에게 값지고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1월 28일 at 6:41 오전

    최부자집 따님이 국민학교 5학년때 담임이었어요.
    그래서 교실이 마땅치 않을때는 이곳 대청마루에서 공부도
    했었어요. 그때는 학교를 육군병원으로 사용해서 우리는 떠돌아
    다니며 공부를 하던 전쟁중이었거든요.

    전국의 옛 부자들중 이 댁은 후손에 의해 망하지 않은 유일한
    부자집이라고 하더라구요.
    대구대학을 설립했고 그때 우리도 조금씩 기부금을 냈던 생각이
    납니다.

    • 초아

      2019년 1월 28일 at 8:53 오후

      어머 그런 인연이 귀한 인연이네요.
      이곳 대청마루에서도 공부를 하셨다구요.
      하긴 전쟁중이었으니 그럴수도 있었겠네요.
      그렇다 들었습니다.
      후손에 의해 망하지 않은 유일한 부자집
      모든 재산을 나라 찾는 일과 교육발전에 전부를
      기부하셨지만, 그 후손님들 지금도 잘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후덕한 집안 베푸신 은혜가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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