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관(3실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20190126_121748[신라 역사관 / 3실 출입구 전경]

제3실에서는 신라의 영역확장과 중앙집권화의 과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불교와 관련되는 흥륜사와 영묘사 출토품, 진흥왕대의
영토 확장을 보여주는 진흥왕 순수비 탑본, 전쟁을 대비해 쌓은 남산신성비와
명활산성작성비,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한 화랑이 남긴 임신서기석(보물) 등이 있습니다.

20190126_121803[포항 중성리(국보 제318호) / 포항 냉수리(국보 제264호) / 울진 봉평리(국보 제242호) / 신라비]

浦項中城里新羅碑(포항 중성리 신라비)
국보 제318호. 2009년 5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 거주하는
김헌도씨가 북구 흥해읍 중성리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한 현존 最古(최고)의 신라비이다.

발견 당시에는 ‘학성리비’로 보고되었지만, 정밀 측량 결과 발견
지점이 중성리로 확인됨으로써 ‘포항 중성리 신라비’로 명칭을 바꾸었다.

浦項冷水里新羅碑(포항 냉수리 신라비)
국보 제264호. 건립 연대는 癸未年(계미년)이라는 간지와
至都盧葛文王(지도로갈문왕)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節居利(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蔚珍鳳坪里新羅碑(울진 봉평리 신라비)
국보 제242호. 1988년 4월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으므로 이를 피해 글을 새겼다.

그러나 비가 지상에 노출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파손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석으로 판명되기 전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포클레인에 의해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비편도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고 있다.
한 면에만 약간의 인공을 가해 글자를 새겼다.

20190126_121809[전시실 내부 우측 영천 청제비(보물 제517호) / 앞쪽 전시된 유물]

20190126_121814[삼국사기 / 지증왕 4년(503)]

20190126_121823[김해 화정유적 46호 석실 묘 출토 유물]

20190126_121828[전시실 내부 전시된 유물]

금관가야를 병합하다.

금관가야는 낙동강의 하구(김해)에 위치한 무역 강국이었습니다.
중국과 왜로 이어지는 바닷길 무역의 거점 지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세기대까지 금관가야는 백제,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할 정도로
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400년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금간가야는 전쟁에 지면서 국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5세기대 이후의 금관가야는 국가의 명맥만 유지하였을 뿐,
가야의 주도권은 대가야로 넘어갔습니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금관가야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국왕 구해(재위 521~532)를 설득하여
마침내 532년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남쪽 변경의 위협을 없애고, 금관가야가 차지하였던
중개 무역의 이득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훗날 김구해의 아들 김무력과
증손자 김유신은 신라 장군으로서 뛰어난 구실을 다하였습니다.

20190126_121842[유리목걸이와 토기류]

20190126_121857[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유물]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대가야시대의 고분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다.
主山(주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20190126_121906a[울주 천전리 각석(복제품) / 6세기(525년 539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사.
역사시대의 조각. 바위그림 및 여러 종류의 명문 유적.

각석은 내용상 선사시대 點刻幾何學的文樣(점각기하학적 문양)과
각종 동물상이 새겨진 상부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線刻畫(선각화)와
명문이 있는 하부로 나눌 수 있다.

20190126_121914[異次頓殉敎碑(이차돈 순교비) 전경]

20190126_121919[異次頓殉敎碑(이차돈 순교비)]

불교를 제창하다 法興王(법흥왕) 14년(527)에 순교한
異次頓(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憲德王(헌덕왕) 10년에 세운 6면 비석이다.

비석의 5면에는 井間(정간)을 치고 글씨를 새겼으나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렵다. 나머지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순교장면은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 石面(석면)에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20190126_121932[전시실 내부 전시된 유물 전경]

20190126_121954[경주 계림보14호묘 출토품]

말안장장식, 재갈, 굽다리접시, 잔, 긴 목항아리, 청동합, 등말안장장식 등

20190126_121957[6세기 중엽 Mid-6th C / 유물]

20190126_122003[6세기 전엽~6세기 후엽 / Early 6th C ~ Late 6th C]

20190126_122007[Late 8th C. ~ Early 9th C. / Late 7th C.]

20190126_122013[돌방무덤의 구조와 부장품 / 석실에서 나온 중국 문물]

20190126_122024[진흥왕 척경비 / 진흥왕 순수비 / 탁본]

20190126_122024-2[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 탁본]

창녕 진흥왕 척경비
국보 제33호.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에 있다.
원래는 창녕읍 牧馬山城(목마산성) 서쪽 기슭에 있었다.

이 비 옆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목마산성
줄기에 잇대어 고분군이 산재해 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鳥居龍藏)가 신라 비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창녕읍 교상리로 옮겨 비각 안에 보존하고 있다.

20190126_122024-1[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 탁본]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이 비는 진흥왕 29년(568)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사동 만덕산 봉우리 아래에 세웠습니다.

진흥왕 때 신라의 동북 국경선이 황초령비가 있는
함흥보다 동북쪽으로 동북쪽으로 더 멀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입니다.

나아가 황초령비에서 판독할 수 없었던
많은 글자들을 새롭게 복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황초령비와 마찬가지로
568년 진흥왕이 순수한 내용을 기념한 사실.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을 칭송한 내용.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 등입니다.

20190126_122048[전시실 내부 전경]

20190126_122051[전시실 내부 전경]

20190126_122103[明活山城作城碑 (명활산성작성비) / 6세기(551년) /경주 보문동]

신라시대에 明活山城(명활산성)을 쌓은 뒤 세운 作城碑(작성비)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성벽
터에서 농부 金奎植(김규식)이 발견했으며,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20190126_122149[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다]

신라는 6세기 무렵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하면서
두 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수도 방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진흥왕(재위 540~576)은 551년 명활산성을 개축하여 수도 방어의
요지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명활산성은 405년 동해안으로 침략해온
왜군을 막는 주된 거점이었습니다. 또한 자비마립간(재위 458~479)이
한 때 피난처로 삼을 정도로 중요한 성곽이었습니다.

진평왕(재위 579~632)은 백제나 왜의 침략에 대비해 수도인 경주
주변의 산에 새로이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계속 정비하였습니다.

591년 남산에 새로운 성을 처음 쌓았고, 2년 뒤에는 명활산성을 고치고
경주 서쪽 선도산에 서형산성을 새로 쌓아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였습니다.
남산에 성을 쌓은 내용을 새긴 비석들이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습니다.

20190126_122159[경주 남산신성비 분포 안내도]

20190126_122111[경주 남산신성비 / 제5비 / 제1비 / 제7비]

20190126_122139[경주 남산신성비 / 제5비 / 제1비 / 제7비]

20190126_122219[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20190126_122219-2[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20190126_122219-1

20190126_122223[전시된 토기류 유물]

20190126_122235[전시된 토기류 유물]

20190126_122241[金銅冠(금동관)]

20190126_122253[안내도]

20190126_122315[용머리기와 등 유물]

20190126_122329[황룡사 목탑 찰주본기]

872년 皇龍寺九層木塔(황룡사 9층목탑)을 重修(중수)하면서
心礎石(심초석) 안에 봉안한 舍利內函(사리내함)에 새긴 기록.

20190126_122335[瞻星臺(첨성대)]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과 대릉원 사이에는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의 첨성대가 있습니다.

그 모양이 마치 하늘로 솟아 있는 우물처럼 생겼습니다.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상방하원의 형태입니다.
잘 다듬은 돌 360여 개를 사용해서 모두 31단을 쌓아 완성 하였습니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쌓은 첨성대는 무슨 용도였을까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름에서 보이듯이 하늘의 별과 달을 관측하기
위한 천문대였을까요.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자 하였을까요. 불교 신앙이 두터웠던 여왕이 나라의 근심을
해결하고자 하늘로 통하는 우물을 만들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선덕여왕 자신의 즉위를 기념하고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었을까요.

20190126_122347a[高仙寺誓幢和尙碑(고선사 서당화상비)]

고선사 서당화상비는 불교의 대중화와 교리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입니다.

경주의 고선사는 원효가 말년에 머물던 절이고,
誓幢(서당)은 원효대사의 어렸을 때 이름입니다.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은 779~780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권력자였던 김언승의 후원을 받아
고선사에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의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애장왕(재위 800~808)대로 추정됩니다.
이비는 원효대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입니다.

20190126_122351a[元曉大師 眞影(원효대사진영) / 복제품 / 14~16세기 / 일본 교토 고산사]

20190126_122402[金仁問墓碑(김인문묘비)]

발견 당시 태종무열왕의 비가 아닌가 물의를 빚었으나 판독된 ‘조문흥대왕’,
‘태종대왕탄미기공’, ‘공위부대총관’ 등의 글귀가 ‘三國史記(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조에 기록된 그의 사적에 해당되고, 그밖의 비문내용도 ‘三國史記(삼국사)’
기록과 부합되는 점이 많아 김인문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초기의 확실한 금석문의 하나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20190126_122409[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

설명 碑文(비문)의 첫머리에 壬申年(임신년)이라는 干支(간지)가 있고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있어,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이라 한다.
비문은 구획선 없이 5行(행) 74자를 새겼다.

내용은 화랑도의 기본정신에 따른
忠道(충도)의 실천을 서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제작연대인 壬申年(임신년)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화랑도가 번창하던 552년, 또는 612년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190126_122421[곱돌 十二支像(십이지상) / 돼지]

곱돌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돼지상이다.
멧돼지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으며,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신장상의 모습이다.

돼지상 외에도 말과 토끼상도
확인되어 십이지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십이지상이 무장의 복장을 하고 있는
신장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이다.

3전시실 소개를 마칩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3월 7일 at 9:09 오전

    우리 어릴때 까지도 첨성대는 마음대로
    올라가던 곳입니다. 그 안에서 숨바꼭질도
    했으니 무너지지 않고 견뎌온게 대단하죠.

    지금도 밭갈이하다 유물이 출토되는 일이
    있을겁니다.

    • 초아

      2019년 3월 7일 at 8:52 오후

      전 아파서 국민학교때 졸업여행을 가지 못하였지만,
      친구들이 첨성대에 올라 찍은 사진을 보여주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그땐 그랬나봅니다.
      하긴 살기 힘든때라..
      문화재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을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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