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武城書院(무성서원)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사적 제166호

20190329_091650[무성서원 안내팻말과 무성서원 입구 홍살문 전경]

무성서원은 崔致遠(최치원)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20190329_091756[무성서원 입구 홍살문]

신라말 정강왕 1년 태산군수(태인)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을 모신 生祠堂(생사당)인 泰山祠(태산사)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오랜 전통을 간직한 서원이다.

生祠堂(생사당):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

20190329_091815[홍살문쪽에서 담은 무성서원 전경]

본래 명칭은 태산서원이었으나 1696년(숙종 22년)
賜額(사액)을 받아 武城書院(무성서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0190329_091834[홍살문 앞 우측 高直舍(고직사)]

 

고려 말 쇠약해졌다가 성종 14년(1483)
丁克仁(정극인)이 세운 鄕學堂(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20190329_091918[絃歌樓(현가루) 현판]

20190329_091845[絃歌樓(현가루) 전경]

외삼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2층 누각인 絃歌樓(현가루)이다
논어의 絃歌不輟(현가불철)에서 따온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라한다.

20190329_091852[絃歌樓(현가루)]

서원의 외삼문 絃歌樓(현가루) 담밖 양쪽에는 碑石群(비석군)들이 줄이어 세워져 있다.
현감들의 선정비와 무성서원 관련 비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합니다.

20190329_093438[領相李公最應不忘碑(영상 이최응 불망비)]

고종 19년(1882) 건립한 ‘領相李公最應不忘碑(영상 이최응 불망비)’
높이 121cm·폭 40cm·두께 20cm로,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무성서원은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영의정을 역임하였던
李最應(이최응, 1815~1882)의 도움으로 서원철폐령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 비석은 그 공적을 기려 세운 것이라 합니다.

anigif[우측 비석군 애니메이션 편집]

anigif-2[좌측 비석군 애니메이션 편집]

20190329_092034[武城書院(무성서원) 현판]

20190329_091944[武城書院(무성서원) 강당(명륜당) 전경]

20190329_092018[강당 안내글 내용]

20190329_092048[武城書院(무성서원) 강당(명륜당)]

서원은 순조 25년(1825) 강당 명륜당이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순조 28년(1828)에 다시 중건되었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祠宇(사우). 絃歌樓(현가루).明倫堂(명륜당).
講修齋(강수재). 興學齋(흥학재). 庫舍(고사) 등이 있다.

명륜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의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20190329_092025[서원 강당쪽에서 담은 絃歌樓(현가루) 전경]

서원 내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부터 講案(강안), 奉審案(봉심안),
尋院錄(심원록), 院規(원규)와 같은 서적들이 보관되어 전해오고 있다.

20190329_092109[사당 내삼문 전경]

20190329_092143[제향영역 안내도와 안내글 내용]

20190329_092130[내삼문]

20190329_092246a[泰山祠(태산사) 현판]

20190329_092201[정면에서 담은 泰山祠(태산사)]

20190329_092214[태산사 안내글 내용]

20190329_092357[좌측에서 담은 泰山祠(태산사) 전경]

사우는 1884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과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최치원을 主壁(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20190329_092528[비각영역 출입구]

20190329_093044[申瑢熙 不忘碑(신용희 불망비) 전경]

20190329_093053[신용희 불망비 안내글 내용]

20190329_093142[申瑢熙 不忘碑(신용희 불망비)]

20190329_093111[申瑢熙 不忘碑(신용희 불망비)]

1925년 세운것으로 碑身(비신)에는 通政大夫(통정대부)
前秘書監丞(전비서감승) 申瑢熙(신용희) 不忘碑(불망비)라 새겨져 있다.

20190329_093337[비각영역 신용희, 서호순 불망비 안내도와 안내글 내용]

20190329_093152[徐灝淳 不忘碑(서호순 불망비) 전경]

20190329_093224[서호순 불망비 안내글 내용]

20190329_093302[徐灝淳 不忘碑(서호순 불망비)]

20190329_093244[徐灝淳 不忘碑(서호순 불망비)]

1849년 哲宗(철종) 卽位年(즉위년) 세운 것으로 碑面(비면)에
縣監(현감) 徐灝淳(서호순) 不忘碑(불망비)라 새겨져 있다.

20190329_092539[무성서원 현가루 우측 협문]

20190329_092519[강학영역 안내도와 안내글 내용]

20190329_092614[講修齋(강수재) 현판]

20190329_092600[講修齋(강수재) 전경]

20190329_092632[강수재 안내글 내용]

20190329_092621[講修齋(강수재) 내부]

서원 외부 좌측담장에는 유생들이 기거하고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던
東西齋(동.서재)인 講修齋(강수재)와 興學齋(흥학재) 자라하고 있었는데, 현재
서재에 속하는 興學齋(흥학재)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 이외에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의 살림집인 高直舍(고직사),
제사 때 제수를 마련하던 곳인 典祀庫(전사고), 碑石群(비석군)
등이 배치되어 있다.

20190329_092657[비각, 기적비 전경]

20190329_092710[丙午倡義紀蹟碑(병오창의기적비)]

구한말에는 崔益鉉(최익현)이 乙巳條約(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강탈당하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遯軒(돈헌) 林炳瓚(임병찬)과 손을 잡고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정도로 항일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崔益鉉(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순창부근까지 진격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관군에 패하여 林炳瓚(임병찬)과 함께 붙잡혔고 대마도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다가 고종 44년(1907) 1월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2년에 정읍군수 김성연이 최익현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丙午倡義紀蹟碑(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20190329_092722[丁汶述重修義助碑閣(정문술중수의조비각) 전경]

20190329_092822[丁汶述重修義助碑(정문술중수의조비)]

20190329_092904[앞쪽 崔永大永世不忘碑閣(최영대 영세불망비각)]

20190329_092951[崔永大永世不忘碑(최영대 영세불망비)]

20190329_093833a[무성서원 담 옆 홍매]

20190329_093714[우측에서 담은 무성서원 전경]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이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단행해
전국의 47개소 서원을 제회하고 모두 철폐하였을 때에도 화를
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훼손되지 않고 무성서원은 조선시대를 거치며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서원으로 걸출한 선비들을 배출한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정극인은 이곳에 들어와 呂氏鄕約(여씨향약)을 기반으로 하여
고현향악을 만들고 학당을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였으며, 이곳의
春景(춘경)을 玩賞(완상)하면서 안빈낙도하는 풍류생활을 노래한
賞春曲(상춘곡)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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