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포 梁彭孫(양팽손) 墓(묘)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20190402_140923[재실옆 연못]

20190402_141025[아랫쪽에서 담은 재실 솟을 삼문 전경]

墓所(묘소)는 雙峰(쌍봉)마을 입구를
들어가다 우측을 보면 산자락 아래에 齋閣(재실)이 있다.

20190402_140929[재실 솟을삼문 앞쪽 주차장과 비석군]

이 재실이 學圃公(학포공)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재실 숙경문 앞 주차장안쪽으로 신도비와 헌금기, 영모재중수기 碑(비)가 세워져있다.

20190402_141145[神道碑(신도비)]

20190402_141139[獻金記(헌금기)]

20190402_141131a[영모재 중수기]

20190402_141055[肅敬門(숙경문) 현판]

20190402_140957[肅敬門(숙경문) 재실 솟을 삼문]

재실 솟을삼문인 숙경문은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숙경문만 담고 묘소로 가려다가 혹시나 하고 재실 옆 담을 따라
조금 오르니 재실로 통하는 협문이 열려 있었다.

20190402_141919[재실 협문]

열린 협문이 반가웠지요.
문이 고장이 나서 수리중이라 개방된것 같았다.
덕분에 우린 영모재를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20190402_141647[永慕齋(영모재) 현판]

20190402_141626[협문쪽에서 담은 永慕齋(영모재) 전경]

學圃(학포) 梁彭孫( 양팽손)은
제주양씨 11세조이고 달아실 양씨의 派祖(파조)이다.
그의 호 ‘學圃(학포)’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學文(문학)의 밭을 일구는 사람’이다.

20190402_141456[협문쪽에서 담은 재실 솟을삼문(숙경문) 전경]

닫혀 있는 문이 서운했었는데,
들어와서 영모당과 솟을삼문인 숙경문을 마음껏 담으니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습니다.^^

20190402_141710[좌측에서 담은 永慕齋(영모재) 전경]

공이 어렸을 때 마을에서 가까운 雙峰寺(쌍봉사)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 때 절에서 묵고 있던 한 客僧(객승) 이 그에게 3곳의 明堂(명당) 터를 일러주었다 한다.

20190402_141531[영모재에사 담은 남편 인증샷]

그의 말대로 능주 목골의 蓮花浮水形(연화부수형)에는 祖父(조부) 모시고,
능주 범골의 猛虎出林形(맹호출림형)에는 父母(부모)를 모셨으며,
雙峰(쌍봉)의 鳳凰抱卵形(봉황포란형)에는 자신이 묘소를 정했다 합니다.

20190402_141244[연못]

재실과 연못 사이의 포장된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墓域(묘소)가 있다.
조금 오르다 보면 두갈래길로 나뉘어 지지만, 어느 길을 택하여 오르던
두곳다 묘소로 가는 길이니 안심하고 한쪽길을 택해 오르시면 됩니다.

20190402_142539[묘소 아래 주차장 전경]

묘소 아래쪽에는 주차장이 2곳이 있다.
아랫쪽과 윗쪽 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옆쪽에 있습니다.

20190402_142532[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20190402_142649[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돌계단이 제법 높았습니다.

20190402_142703[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오르고 또 올랐지요.
그랬더니 묘소에 도착되던걸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뫼가 없듯이…ㅎㅎ

20190402_142710[돌계단 에서 담은 묘 앞 석물 전경]

20190402_142723[惠康公學圃梁先生墓(혜강공학포양선생묘) 전경]

중종 5년(1510) 趙光祖(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중종 11년(1516) 式年文科(식년문과) 甲科(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조카뻘되는 10대 양산보를 최고 실력자 정암 조광조에게 추천하여
중앙정계에 입문하게 했으며. 또한 조광조와 함께 수학하고서 사림세력을 키우고
왕도정치를 주창한 인물이기도 하다.

己卯士禍(기묘사화) 때 능성현(1632년에 능주목으로 승격)으로
유배 와서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다.

20190402_142740[좌측 문인석]

20190402_142748[우측 문인석]

20190402_142800[묘앞 석등]

20190402_142751[우측 망주석]

20190402_142807[좌측 망주석]

20190402_142815[惠康公學圃梁先生墓(혜강공학포양선생묘)]

양팽손은 우리 민족에게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안견의 화풍을 이은 ‘산수도’는 사림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몇 안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또 그의 문집.학포집 부록에 실려 있는 기묘당금록은
기묘사림의 구성원을 파악하는 데에 긴요한 자료이며,
고향 화순에 소중한 향토문화유산을 學圃堂(학포당) 남겼다.

20190402_142824[墓碑(묘비)]

20190402_142900[묘 뒤에서 담은 안산]

學圃堂(학포당)이다.
양팽손의 서재였으나 현 건물은
당시의 건물이 아니고 1920년대에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양팽손은 1521년 학포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그림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가 그린 묵죽도와 후손이 제작한 학포 영정 등은 임진왜란 때 약탈되어
일본 야마구치현 대원사(大原寺)에 소장되어 있어 후손들이 1957년 가서
사진 촬영해 왔다 합니다.

20190402_142929[묘소에서 내려다 본 묘 아래 주차장 2곳 전경]

20190402_143117[묘소 계단위에서 담은 아래쪽 전경]

20190402_143535[묘 아랫쪽 주차장쪽에서 담은 앞쪽 전경]

앞쪽 둔덕위의 맨 끝쪽에 묘가 한기 자리하고 있네요.

20190402_143455[둔덕위 끝 자리 묘]

제가 주차장에서 보니 남편이 올라가는게 보여 한장 담아봤습니다.

20190402_143429[아랫쪽 주차장에서 담은 학포공 묘소 전경]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성에 유배되자
양산보 등 그의 많은 제자들이 남행에 동행했다.

양산보는 이 길로 10대 정계 은퇴자가 되어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배소는 능성 읍내 문씨 집에 정해졌다.

갑자기 사약이 내려와 조광조가 사사되자,
양팽손이 그대로 두라는 임금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하여 능성현 쌍봉 중조산 아래
(현재 이양면 증리 서원동 일명 조대 감골)에 가매장하였다.

이듬해 그의 가족과 함께 선영으로 운송하고
그 자리에 茅屋(모옥)으로 사당을 짓고 문인. 제자들과 함께
享祀(향사)한 것이 ‘竹樹書院(죽수서원)’의 시초라 합니다.

20190402_143712[묘 앞 전경]

누구의 묘인지 묘비도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학포선생의 묘 앞 쪽 둔덕 높은 곳 끝에 자리하고 있기에
남편이 담아온 사진을 올려봅니다.

20190402_143537[묘 뒤에서 담은 안산]

그 후 조광조의 신원이 단행되고, 관작이 회복되고,
문묘에 봉안되니 1570년 조정의 명에 의하여 능성현
(현재 한천면 모산리)에 서원을 세워 ‘竹樹(죽수)’의
사액을 받았고, 인조 8년(1630)에 양팽손을 함께 향사하였다.

고종 5년(1868) 서원훼철령이 내려지자
고종 6년(1869) 위패를 埋安(매안)한 후 철폐되었다.
그 후 1971년 4월 23일 능주 유림과 학포의 후손들이 재건했다 합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4월 26일 at 7:41 오전

    부인이 세분이셨나 봐요.
    묘비를 보니 한 부인과는 합장, 나머지 두 부인은 좌측묘에
    이렇게 이해가 되는데 맞나요?
    모두 명이 짧았나 봅니다.

    멀리까지 다니시느라 애도 쓰지만 산천경개 구경은 잘 하시겠어요.
    늘 펀안하기를 바래요.

    • 초아

      2019년 4월 26일 at 9:52 오후

      맞아요. 부인이 세분이셔요.
      본부인은 함께 합장, 나머지 두 부인은 좌측묘에 합장
      정학하게 맞추셨어요. 부인들의 명이 짧았나봅니다.
      다니는것은 오히려 좋아합니다.
      아마도 거리귀신이 씌였나봐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주어진 시간 만큼
      더 많이 즐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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