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따라.

인왕산정상에서~~~창의문

성곽의안쪽길

계단이란길이결코편한길은아니지만…

그래도이길로내려와야했었는데…

많은사람들이이계단으로내려가는데…

나는성곽밖의길로내려왔습니다.

사서고생한거지요.

그러나호젖한길을걸으며여러모습의성벽도구경하고

아무곳에나털석주져앉아하늘도쳐다보고

아쉬웠던건

커피를가지고오지않은것

커피마시며쉬면얼마나좋았을까!하는아쉬움!

산다는것이무언지?하산길에만난위험한길

바위의틈바구니피할려면내려온길다시올라가야하는데

저좁은공간에삶의자리를잡은생명의앞서내려가던처자가어찌나비명을질러대던지

휘젖는손짓이애처로워서…지레기죽어

다리가후들후들떨려서죽을뻔했던쇠사다리!

성벽은태조때축성됐는데

97구역으로나누어지금으로하면’지방자치단체’에할당하여성을쌓게했다고합니다.

하자가생겨보수를해야할때도,

개축해야할때도,

축성한’지자제’에서했다고합니다.

말하자면지금의’실명제’와같은의미겠지요.

지금이라면이방법이먹혀들어갈지

의심되는부분입니다.

이름모를꽃들도많았는데

꽃사진찍는것워낙자신없다보니그냥스쳐버렸네요.

성곽이끝나는곳에’윤동주시인의언덕’이있었습니다.

시인이연희전문시절에누상동에있는소설가김송의집에하숙하면서

‘서시”별헤는밤’등의작품을쓴것으로알려짐으로

그때시인이인왕산자락을거닐며시상을구상했을것이라는짐작으로

종로구에서만든었다고합니다.

작은공연장같은시설도있고잠간쉴수있는쉼터같은곳입니다.

창의문(彰義門)

북문()또는자하문()으로도불린다.

1396년(태조5)서울성곽을쌓을때세운사소문()의하나로창건되어창의문이란문명()을얻었다.

북한()·양주()방면으로통하는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16)풍수지리설을주장하는자들이이곳의통행이왕조에불리하다하여

폐문()한채일반의통행이금지되었다가1506년(중종1)에다시열어놓았다.

1623년인조반정()때는능양군(:인조)을비롯한의군()들이이문을부수고

궁안에들어가반정에성공한유서깊은곳이기도하다.

문루()는임진왜란때불타없어진것을1740년(영조16)다시세우고다락안에

인조반정공신들의이름을판에새겨걸었다.

1958년크게보수하였으며,정면4칸,측면2칸의우진각기와지붕으로

서울사소문중에서유일하게완전히남아있는문이다.

(네이버에서)

북악산성곽이시작되는곳

문루에서쉬면서내려다보는사람들도있구요.

그날은공휴일이어서어딜가나사람들…사람들…

빨리집에가고싶은생각만나던날이었습니다.

최규식종로경찰서장

1932년9월9일강원도춘천에서출생하였으며동아대학교를졸업하고부산대학교에서정치학석사학위를받았다.
1961년경찰관이되었으며1967년10월서울종로경찰서서장으로부임하였다.
1968년1월21일북한의특수부대인124군부대소속무장공비인김신조일당31명이박정희등
정부요인을암살하기위해청와대를기습하였다.
사건당일무장공비일당이국군으로위장하여세검정자하문을지나다가검문에서발각되었고
이과정에서총격전이벌어졌다. 무장공비는슈류탄과기관총을난사했고보고를받고현장으로달려간최규식서장은총격전에서 총탄을맞고순직하였다. 사후경무관으로특진되었으며태극무공훈장이추서되었다.서울시종로구청운동자하문(창의문)앞에 그를기념하는동상이세워져있다. (네이버에서)

조금떨어진곳에

정종수경사의순직비도있습니다.

이사건으로향토예비군이생겼고

나중에’실미도사건’이된특수부대도생겼고

우리같은민생들은지레겁도먹고…

나중에이후락이김일성만나러이북에갔을때

김일성이난모르는일이라며딱!잡아떼드라네요.

딱!잡아떼는건그집안의내력인가봅니다.ㅎ

*발견이윤문기가추천하는

‘서울의걷기좋은숲길’에소개된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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