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대표적인읍성이다.읍성이란읍을둘러싸고세운평지성으로해미읍성외에고창읍성,낙안읍성등이유명하다.
지정번호:국가지정문화재사적116호
위치:충청남도서산시해미면
조선시대축성된읍성중가장잘된역사적가치가높은성으로태종18년(1418년)에축성을시작하여성종22년에완공했다.총길이1,800m성벽높이5m로정문인진남문과망루는보존되어있으나동문과서문은붕괴된것을복원한것이며,선조12년(1578)충무공이순신이병사영의군관으로부임하여10개월간근무하였던곳이기도하다.
5만9천평의넓은벌판에이고장에서나는화강암으로성외곽을쌓고안쪽을흙으로쌓아올려높이5m,둘레1천8백m의성곽을만든뒤성벽밖에깊이2m의연못을파놓은외침을막던전형적인성이다.
읍성의정문인진남문은무지개모양을본떠만든석문으로,축조당시의원형을그대로간직하고있으며특히단층의팔작지붕이위풍당당하다.북서쪽에는적의접근을막기위해성밖에깊이판해자가아직도남아있다.
성벽둘레에탱자나무를심었다고해서일명’지성(탱자나무성)’이라고도불렸으나지금은탱자나무의흔적을찾아볼수없다.
진남문을지나100m쯤가면관아의정문(사진상단)과동헌9칸을비록해내아,객사등이있다.
얼마전까지만해도성안에서장이서는등지역주민들의생활공간으로활용되었지만지금은문화재관리차원에서모두성밖으로옮겨졌다.
영장(營將)을두고서해안방어의임무를담당하던곳이며,폐성된지오래되어성곽이일부허물어지고,성안의건물이철거되어그자리에해미초등학교와우체국·민가등이들어서는등옛모습을찾을수없었으나,1973년부터읍성의복원사업을실시,민가및관공서가철거되었다.
본래의규모는동·서·남의3문이있었고,옹성(甕城)이2개소,객사(客舍)2동,포루(砲樓)2동,동헌(東軒)1동,총안(銃眼)380개소,수상각(水上閣)1개소,신당원(神堂院)1개소등매우큰규모였다고전해진다.현재복원된것은3문과객사2동,동헌1동,망루1개소뿐이다.
최근복원및정화사업을벌여옛모습을되찾아사적공원으로조성되었으며,조선말천주교도들의순교성지로도유명하다.
천주교박해당시관아가있던해미읍성으로충청도각지역에서수많은신자들이잡혀와고문받고죽음을당했으며,특히1866년박해때에는1천여명이이곳에서처형됐다고한다.
성내광장에는대원군집정당시체포된천주교도들이갇혀있던감옥터와나뭇가지에매달려모진고문을당했던노거수회화나무가서있다.
바로성문밖도로변에는회화나무에매달려고문을받으면서도굴하지않은신도들을돌위에태질해살해했던자리개돌이있어천주교도들의순례지가되고있다.
성벽주위에는탱자나무를심어적병을막는데이용하였다고하나지금은거의찾아볼수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