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3일 인천향교& 도호부청사~~

2011년1월13일인천향교&인천도호부청사

인천에살면서도인천향교옆을지나다니면서언제한번들려본다

하다가오늘시간을내서도호부와향교를카메라에담아본다.

도호부와향교를돌아보니조선시대의관청에엣모습을한눈에

볼수가있는듯하다.당시에는일반서민들은관아를들어오려면은

여간해서들어올수없었을것인데동헌에서에목민관에호령소리

가지금도들리는듯하다.

날씨가매섭게추워서인지향교를찿는이는아무도없고나혼자

여유를부리면서청사내를카메라에담아본다.

오늘밤부터는날씨가흐려서새벽부터다시눈이많이온다는데오후

날씨는카메라에향교풍경을담기에는아주괞찮은편이다.

도후부와향교에서는해마다명절에는전통민속놀이와체험을연다고

한다잊어버릴듯한우리의소중한문화유산을경험해보는것도좋은

추억거리인것같다.


도호부는조선시대행정기관의하나로상급기관인목(牧)과하급기관인군(郡)·현(縣)사이에서행정을담당했던관청이다.
조선시대에는전국을8도(道)로나누고도(道)아래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두고지방행정업무를관장하였다.
인천에도호부가설치된정확한연대는알수없으나조선시대초기학자이자명신(名臣)인강희맹(姜希孟)이쓴"인천부호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1424년이미객사가있었던것으로기록하고있어최소한그이전에도호부가설치된것으로추정된다.
인천도호부에는당초왕권의상징인객사(客舍)를비롯하여부사의집무처인동헌(東軒),내동헌(內東軒)등15~16동의건물이있었던것으로전하는현재는문학초등학교교정에객사와동헌일부만보존되어있다.이곳에복원한건물은국립중앙도서관에소장되어있는<花島鎭圖>를근거로객사,동헌,공수등7동의건물을복원하였다

명륜당은외벌대의기단위에정면5간,측면2간의팔작지붕으로구성되어져있다.건물의규모는55.18㎡(16.72平)이고정면의주간은어간과퇴간은2.250㎜(8.25曲尺)이고협간은2,450㎜(8.09曲尺)이며,측면은전면간은2,250(7.43曲尺),배면간은2,200㎜(7.26曲尺)으로서正面長과側面長의比는2.79:1로나타난다.

내부는장귀틀과동귀틀로구성된우물마루로이루어져있으며양퇴간의중앙에내진주를세워놓아대량과측면의충량을받고있다.초석은원형의막돌초석으로덤벙주초방식을하였으며기둥은모두두리기둥으로서약간의민흘림을두고있다.이건물의출입은배면쪽에서이루어지므로정면의창호는어간과양협간의하부에머름이가설된2분합의판문으로서조망용으로가설되었음을알수있다.정면의양퇴간은상인방과중인방사이에작은띠살창을꾸며놓았다.배면은2분합의띠살문으로어간과양협간에만가설하였고양퇴간과좌우측면은중·하인방으로벽체를구성하였다.

공포는기둥머리에창방과직교하여살미를놓고그위에주두를올려놓고대량을받는초익공으로서살미의끝은수서형으로하부는내외부모두화려한파련형의초각을하였다.가구는5량가로서어간의양기둥위에만대량을놓고내진주가있는양협간에는퇴랴을내진주의기둥머리에맞보형식으로맞추어놓았다.대량위ㅔ는동자주를놓아종량을받고있으며동자주의머리에는십자형의보아지를파련형으로초각하여맞추어놓고그위에주두를놓고종량과중도리를받고있다.종향의중아에는파련형의판대공을놓아종도리를받고있다.

지붕은네면모두서까래위에부연을덧달아올린겹처마로구성된팔작지붕으로처마의앙곡은거의나타나지않는다

下馬碑는“大小人員皆下馬”로새겨져있는데이는향교앞을지나갈때는“신분과나이를막론하고누구나말에서내려라”라는뜻을가진비석입니다.공자님과선현들을모신신성한교궁이고선비들이공부하는학당이므로경건한마음으로조용히향교앞을지나가라는의미가있는비석입니다.善政碑는선정을베푼지방관리의공덕을기리기위하여백성들이세운비석으로옛인천부사들의선정내용이비에새겨져있습니다.



버스를이용하실경우
시내버스4번,6번,13번,27번64번
마을버스515번522번523번
좌석버스111번
지하철을이용하실경우
문학경기장역에서하차하여야구장방면으로나오시면됩니다.
고속도로이용하실경우
제2경인고속도로인천항방향

인천도호부청사
인천광역시남구문학동349-2번지☎032)422-3492/Fax:032)425-3493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