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여행( 평창 이승복 기념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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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李承福,1959년12월9일~1968년12월9일)은대한민국의학생으로1968년에발생한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의희생자이다."나는공산당이싫어요"라는발언을한것으로널리알려져있다.

이승복은강원도평창군진부면(지금의용평면)도사리에서태어나1967년3월2일에속사국민학교계방분교(지금의속사초등학교계방분교)에입학했다.1968년11월2일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때삼척시의바닷가를통해서대한민국으로무단침입한북한의무장간첩에의해서12월9일밤어머니와남동생,여동생과함께살해당했고그의형과아버지는크게다쳤다.공교롭게도이날은그의생일이었다.

12월11일조선일보는3면에이사건을〈“共産黨(공산당)이싫어요”어린抗拒(항거)입찢어〉라는제목의기사로다뤘다.이기사는현장을목격하고유일하게살아남은이승복의형의증언을인용하여"무장공비가가족을몰아넣고북괴의선전을하자이승복이“우리는공산당이싫어요”라고대답하여공비들이이승복의입을찢고가족들을몰살시켰다"고보도했다.[1]12월13일에제작된대한뉴스제705호〈남침공비를무찌른다-제3신〉편에서는이사건을“공산당이싫다고해서어린젖먹이를돌로때리고입을찢어죽인이들의만행”이라고보도하면서일가족의시신을공개했다.

이후이사건이국민학교(지금의초등학교)도덕교과서에실리고,국민학교마다이승복의동상이세워지는등반공정신의상징처럼되었다.교과서에서는이내용이제6차교육과정에서부터빠졌다.

[편집]의혹제기 [편집]시초 계간저널리즘1992년가을호에당시미디어오늘의편집국장김종배는〈“공산당이싫어요”이승복신화이렇게조작됐다〉라는기사에서,당시조선일보의기사가허위라고주장했다.[2][3]그는조선일보기사에서이승복의형의이름을잘못기록했다는점,그의집이마을과멀리떨어져있어소리를듣기가사실상불가능하다는점,후에이승복의형이조선일보기자를만난적이없다고밝힌점을지적했고,이승복시신의입이찢어져있지않았다는주민의증언을인용하면서조선일보의기사를“작문”이라고비판했다.

1998년당시언론개혁시민연대사무총장인김주언은서울과부산에서‘오보전시회’를열어김종배의기사를전시했고,이후10월에는미디어오늘과월간말을통해더많은근거를들어오보내지는작문이라는주장을했다.

[편집]경과 1998년11월조선일보는김주언김종배두명을명예훼손으로형사고소했다.1999년7월서울지방검찰청은두명을불구속기소했고,2002년형사1심에서두명에게각각징역6월과10월을선고했다.[2][3]

2004년10월28일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있었던항소심에서는김주언에게징역6월에집행유예2년,김종배에게무죄를선고했다.재판부는판결문을통해조선일보의기사는사실에기초한것으로판단되지만,거기에대한의혹보도역시충분한구체성을가지고있다면언론의자유에서용인할수있다고밝혔다.이어2006년11월24일대법원에서원심을유지하기로결정함에따라사건이마무리되었다.

[편집]결론 14년간왜곡,조작시비가있어왔지만대법원은이승복사건의조선일보보도는진실이라고판결했다.[2][3]법원은두가지핵심쟁점중이승복의발언에대한진위는관계인들이모두사실이라고진술하고있어이제는더이상따질수없는문제가됐고,조선일보기자가현장취재를했는지여부는조선일보에서제출한당시현장사진들에취재기자의모습이등장하는점등에비춰조작설을주장한피고인들에게모두유죄를인정했다.이승복은함께살해당한그의어머니,남동생,여동생의묘소옆에나란히잠들어있다.한편육·해·공군·해병대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회원들은1999년이후매년이승복의기일마다기념관과그의묘소를참배하고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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