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호부청사.
인천시남구관교동에있는인천도호부청사는조선시대의지방행정조직으로
1413년(태종13년)에전국을8도로나누었고.도밑에는대도호부.목.도호부.군.
현.등이있었으며.인천도호부에는10개의면과그밑에는다수의동.리.촌이있었고.동.
리의밑에는매5호를한개의통으로하는5가작통제가시행되었다고한다.
도호부는중앙에서퍄견된도호부사아래에.이.호.예.병..형.공방의6방을두어사무를
분담하게하였는데.이를담당하는자가지방의향리였으며.1485년(성종16년)경국대전
에규정된당시인천도호부향리의수는26인이나그수는점차늘어났다고한다.
인천부읍지에의하면은관할구역은1748년(영조24년)당시에는강화.영종.덕적도등이
인천에속하였으며인구는2천6백여가구에8천여명이거주하였다고기록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전국을8도(道)로나누고도(道)아래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두고지방행정업무를관장하였다.
인천에도호부가설치된정확한연대는알수없으나조선시대초기학자이자명신(名臣)인강희맹(姜希孟)이쓴"인천부호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1424년이미객사가있었던것으로기록하고있어최소한그이전에도호부가설치된것으로추정된다.
인천도호부에는당초왕권의상징인객사(客舍)를비롯하여부사의집무처인동헌(東軒),내동헌(內東軒)등15~16동의건물이있었던것으로전하는현재는문학초등학교교정에객사와동헌일부만보존되어있다.
이곳에복원한건물은국립중앙도서관에소장되어있는<花島鎭圖>를근거로객사,동헌,공수등7동의건물을복원하였다
객사는임금의위패를모시고있는건물로서수령의집무실인동헌보다도격이높았으며그런만큼
관아시설중에서도규모가제일크고화려하며전망이가장좋은곳에자리잡고있다.
객사는신성한건물로서위엄을드러내기위해설계되었는데가운데채가좌우채보다한단계보다
높은솟을대문형식으로지어진독특한지붕이다.
전패를모시고있는가운데채가전청이며부사가정기적으로예를올리면서임금에대한충성을다짐
하는곳이었다.
좌우의익사는중앙에서내려온사신의접대와숙소로이용되었다.
동헌은부사의집무실로서객사의동쪽에있다하여붙혀진이름이다.
건물의격식은객사보다한단계떨어졌으나그지역최고실력자의
지위에합당하게끔위엄을느낄수있도록설계되었다.
중앙은마루로된대청으로지방의일반행정업무와재판이여기서
행하여졌고.좌우의온돌방은숙식공간이라기보다는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이었다.
수령의가족이머무는내아는따로배치되었다.
곤장
조선시대형구의하나.버드나무로만들어져도둑이나군률을어긴죄인의볼기를
치는것으로중곤.대곤.중곤.소곤.치도곤의5가지형별이있다.
충의비.
이비는조선왕국개국(1392년)으로부터한일합방(1910년)까지인천도호부사를
지낸355인의성명을새긴것으로이는조선왕조실록과1899년발간된인천부읍지
등을바탕으로작성하였다.
유교정치이념에서충과의는가장기본적인덕목으로신하는임금에게충성을.
임금은신하와의바른도리인의를실천함으로써이를통해민본정치를구현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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