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여행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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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효종대왕릉..

효종릉 주위 에는  그윽한 푸른 소나무들이 주변에 울창하다.

그래서 세종대왕릉 에  비해서 찾는 이가 적어 사방이 조용하고 호젓함을 느낀다.

효종릉 은 원래는 처음에 건원릉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석물에 틈이 생겨서

현종 14년 (1673년) 에 여주 영릉 동쪽의 현재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효종왕릉은 관광객의 대부분이 세종대왕릉을 보고 대부분 발길을 돌리기때문에

효종왕릉은 찾는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세종대왕릉 입장권만 소지하면은 입장을 할수가 있다.

그냥 돌아가지 마시고 왕의숲길을 천천히 걸어서 맑은공기와 어쩌면은 딱다구리가

둥지를 찍는소리도  들을수가 있고  새소리를  들으면서 걸어보면은 좋을것 같다.

영릉()

영릉은 세종대왕릉 왼쪽 언덕에서 잘 해야 500m쯤 떨어진, 조선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이다.

 효종릉 역시 능역과 푸른 소나무들이 주변에 울창하여 그윽함을 풍기지만 세종릉에 비해 찾는 이가 적어 사방이 조용하고 호젓하다.

효종왕릉 전경인선왕후릉과 효종릉이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고 있다. 뒤에 있는 효종릉은 앞에 있는 인선왕후릉과 달리 곡장을 두르고 있다.

재실은 대개 관리사무소로 쓰이는데 이곳 영릉은 비어 있다. 능을 감싸며 유장하게 흘러내려온 묘내수는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를 빠져나와 참도를 가로질러 흐르고, 참도 가운데에 금천교가 놓인 것이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이채롭고 절묘하다.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3)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십이지신의 병풍석을 쓰지 않은 것도 조선왕조 능제에 새로운 시금석이 된다.

십이지신 병풍석은 세조 이래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되어 쓰여왔던 것이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 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7세 때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로 피신했으나 인조가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자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다. 8년 만에 돌아와 즉위하니 이때가 1649년.

왕위에 오른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민중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 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렸다.

역법()을 개정하고 『인조실록』 『국조보감』 『농가집성』 등을 간행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효종은 무엇보다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비개편은 물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 병자호란 때 당했던 한을 씻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재위 10년 만에 왕의 나이 41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니,

 청나라에 당한 한을 가슴에 묻고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였다. 불운했던 시대의 불행했던 왕이다.

본래 동구릉 자리에 있던 영릉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은 현종 14년(1673)이다.

능의 석물에 틈이 생겨 능 안으로 물이 스며들 염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왕비 인선왕후도 이장하여 쌍릉으로 안치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효종대왕릉 을 뒤로하고 호젓한 숲길로 걸어내려서면은 효종 재실에

도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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