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마도 여행 첫날.
오전에 대마도에 도착을 해서 간단히 점심을 들고서 오후의 일정은
대마도에서 최북단에 있는 와나우라의 한국전망대 를 들려보기로 한다.
쓰시마의 최북단에있는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곳으로
유명한곳이다.
한국 부산까지의 거리는 49.5킬로 일본 큐슈 후쿠오카의 거리는 132킬로
로 한국 부산이 아주 가까운 거리라고 볼수가 있다.
날씨가 좋은날에는 부산시의 거리가 보이는 그야말로 국경의 섬인것을
실감하게 하는곳 이라고 한다.
전망대 주변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고 해안단구의 높은 지형에
전망대는 자리잡고있어서 멀리 작은 무인도들이 징점다리같이 보이는
정말 전망이 제일 좋은곳에 자리잡고있다.
대마도의 앞바다는 대한해협으로 바다의 조류는 매우 빠르며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심하게 거칠어 진다고 한다.
한국 전망대 옆으로는 조선 역관사 순국지비 가 세워져 있다.
조선조 1703년에 조선통역관 113명과 1명의 일본인을
태운 배가 대마도에 도착하기전에침몰되여서 113명의 조선통역관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때 113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워진 비석 이라고 한다.
저앞으로 보이는 건물은 일본 해상자위대 레이더 기지 라고 한다.
한국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대마도 앞바다 이곳에서 조선에서 오던 통역관들이
배가 침몰하여서 전원 사망 하였다고 한다.
조선역관사 순국지비 옆에서 같이간 일행들이 가이드가 설명해주는 역사말을
열심히 경청 하고 잇다.
해마다 침몰한기일이 되면은 한국의 후손들이 방문하여서 기일을 잊지않고
재를 오래전에 일인데도 말이다.
한국 전망대 내부에는 한국어로 적어 놓아서 한국 관광객들의 불편함은 없는것 같다.
망원경으로 북쪽을 보니 부산의 전경이 보이지는 않는것 같다.
아주날씨가 청명한날이나 보일것 같다.
아마 청명한날 밤에는 야경으로 부산의 밤모습이 이렿게 보이는것 같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이 그 예가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宗氏]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소 요시토시를 기리는 반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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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기는 다음편으로 이여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