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추암 촛대바위 해변.
지난달 말에 강원도 설악산을 다녀오다가 모처럼 강원도를 와서 그냥
집으로 올라오기가 좀 이른것같아서 무작정 동해고속도로 를 타고서
삼척으로 내려온다.
삼척은 사진을 담는 이들에게는 일출을 꼭 한번 담고싶은곳이있는데 그곳이
추암 촛대바위 해변인것이다.
추암해변 에서 일출을 담으려면은 날씨가 쾌청하고 아침에 안개가 끼지
말아야 하는데 추암해변 으로 도착을 해서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아침
일기예보가 안개가끼고 썩좋지않다고 하는 일기예보가 나온다.
일단 해변에서 아주 가까운거리에 있는모텔에다 방을 정하는데 주중이라
아주저렴하게 방값을 내고 하룻밤을 묵기로 한다.
일단 방에다 가볍게 짐을 풀고 아직 낮과같이 밝은 시간 인지라 추암해변
을 들려보기로한다.
서해안과 달리 깨긋하고 파아란 바닷물이 렌즈로 보는물빛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기만 하다.
이날은 한여름날 같이 날씨가 30여도 올라가는 무더운날씨로 더운날씨였다.
한국관광공사가 한국의 가볼만한곳 10선으로 선정한 해돋이 명소이자.
애국가의 첫 소절의 배경 화면으로 등장을하던곳이 동행의 촛대바위인것 이다.
1년 365일 자고나면은 지구가 멸망하지않는한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은
한해의 연초에는 여느곳보다 너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곳이 이곳이다.
나홀로 여행을 온사람이 이곳까지와서 하룻밤을 묵는다고 하니 어째든
내일 해돋이는 보고서 카메라에 담아보아야겟다는 생각이 다시한번 든다.
기상청 일기예보가 요즈음은 정확해서 내일 기상은 영안개가 끼이는새벽
이고 안좋다는걸을 그냥 집으로 올라 가버릴까하고 마음에 갈등을 느끼여서
해변에서 사진을 몇장 담아보고 저녁을 먹으려고 횟집에 들어선다.
혼자 모처럼 음식점에는 여간해서 안들어가는편 인데 횟집 에 들어가서
방어회 한접시와 매운탕을 시키고 강원도에서 보는 소주를 한병시키고
혼술을 한다.
혼자 바닷가를 내려다보면서 홀짝 거리다가 소주 두병을
들게되니 알달딸 한다. 이러다가 내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해변으로
나와야 일출을 담아야 하는데 아 이젠 그만 해야지하고 접고 일어선다.
너무 과한것 같다.
평소에 바닷가를 접하지 못한것이 아니것만 수도권 서해바다의 탁한 바닷물만
만나보다가 동해안 의 아주맑은 푸른바닷물을 만나지 가슴이 뻥둘린 기분이다.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봐야 하는데 일기예보가 영시원찮게 나오니..
남한산성의 정동향 이 바로 이곳 추암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추암 해변 중간에 해당화는 드문드문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것이다.
1979년 5월 30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삼척심씨(三陟沈氏)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 삼척심씨의 시조 심동로(沈東老)가 낙향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심동로의 자는 한(漢)이요, 호는 신제(信齊)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한림원사(翰林院使) 등을
역임하고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세가의 비위를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때 왕이 이를 만류하다가 동로(東老: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의 양성과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왕은 다시 그를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지금의 해암정(海岩亭)은 본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 다시 중수한 것이다. 건물은 낮은 1단의 석축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 형식이다. 4면 모두 기둥만 있고 벽면은 없다. 뒤로 지붕보다 조금 높은 바위산이 있어 운치를 더해 주며,
이곳에서 보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라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이 덕원(德原)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이곳에 들러
草合雲深逕轉斜(초합운심경전사: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추암해수욕장 근처 해안에 있다. 바다에서 솟아 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 전설에 따르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남겨놓았으며, 이때 혼자 남은 남자의 형상이 촛대바위라고 한다.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며
,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부부바위,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불린다.
이곳의 바위군(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 일대의 석회암이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던 한명회(韓明澮)는
이곳의 바위군(群)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波臺)라고도 하였다.
예로부터 영동지방의 절경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해돋이 무렵, 태양이 촛대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해돋이 명소로 각광받는다. 주변에 추암해수욕장, 해암정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