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수준, 같은 해석, 같은 감명(感銘)

lecture2-1

*이상봉 박사의 영성강좌 “나, 지금 바로 여기에!”

같은 수준, 같은 해석, 같은 감명(感銘)
[같은 수준 끼리나 통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감명을 받는 것인데…]

“오뉴월 하루 햇살이 어딘데!” 라는 표현이나,
“밥그릇 숫자가 말해 준다니까!” 라는,
한국 군대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나…
모두 다, 살아온 경험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경험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긴, 같은 경험을 하였드라도, 그 경험을 어떻게 제대로 이용 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따로, 떼어 놓고 볼 때에는,
나이, 삶의 경험이라는 것이 별것 아닌 것 처럼 보여지지만…
여러 명을 모아 놓고 보면,
놀랄만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게 되어있다.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볼 때에,
그 학년의 차이에, 깜짝 깜짝, 놀라게 될 적이 많이 있는데…
아마도, 이렇게 설명을 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초, 중, 고 학교에서, 전교의 학생들이
학년 별로 정렬하여 서있는 모습을 내려다 보면
그 학년의 차이점이 그냥 한눈에 보여지게 되어있다!
학년 간의 차이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겉모습, 신체의 크기, 서있는 자세 등등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쉽게 구별이 된다.

만약 말이다,
그와같은 차이가 없다면…
성장이라는 것이 그 무슨 의미가 있으며,
배움이라는 것이 그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미국에서는(영어 표현에는) 잘아는 척하고, 설치는 사람을,
일컬어 “He (She) is a sophomore!” 라고 하는데…
그 표현이 아주 재미있다.
‘Sophomore’ 라는 것은 고등학교나 대학의 ‘2학년’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은 고등학교도 4년제 이고, 대학도 4년제 이다.
1학년은 Freshman, 2학년은Sophomore, 3학년은 Junior
그리고 졸업반은Senior 라고 부르는데…
여학생도 1학년은 그냥 Freshman 이라고 부르지,
Freshwoman 이라는 말은 없다. 그 단어 만큼은 男女 共히 같다.]

———————————-

이왕,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국의 학교 설명을 좀 하고 넘어가야만 될 것 같다.

미국은 고등학교만 되어도,학교 생활이 비교적 자유롭다.
(하긴, 자동차 운전은 16살 부터 할 수 있고,
투표는 18살 부터 할 수 있으니,
고등 학생이라고 해도, 한국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수업시간, 교과목이나 교육과정 뿐만이 아니라, 과외활동도 그렇고…
하다못해 점심 시간도 제 각각 다르게 정해져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학교처럼, 전교생이 한꺼번에,
정해진 점심 시간에만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학년이라고 해도, 수업 시간표가
어떤 학급은 2교시에, 어떤 학급은 3교시에 점심 시간이 들어 있고,
점심 시간이 없이 계속해서 수업 시간으로 정해진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 보다 그만치 수업을 일찍 끝내고 귀가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고등학교 인데도…
교실 내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들도 있고
(학생들이 해당 과목의 강의실을 찾아가서 수업을 받는 것이다),
교정에서 놀고 있는 학생도 있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도 있고…
이와같이, 수업 시간이 서로 다르게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업 시간에 빠져도,
별로 눈에 띄이지 않게 되어 있으니…
수업 시간에 빠지고 노는 것, 무단 결석,
Truancy(농땡이)가 흔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대학에서는 강의에 빠지는 학생들이 없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 까지는 의무 교육이기에 웬만해서는 졸업을 시켜주고,
또 낙제 점수에 해당되는 학생들은 여름 방학 기간에 있는
특별 수업을 통해서라도, 다시 기회를 주지만…
대학의 경우는, 강의 시간에 몇번의 무단결강을 하면,
낙제가 되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농땡이는 허용이 안된다.

(대학에서는 수강 신청을 했다가, 그 과목을 못따라 가겠으면,
본인 스스로 그 과목을 취소 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냥 강의 시간에만 참석했다고 해서… 거져로 점수를 주는 예가 없다.)

미국의 대학, 그곳은 정말로 공부하는 곳이고 학문하는 곳이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은? 굳이 대학으로 갈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비록 좋은 직업, 직장을 갖기 위한 하나의 방편과 투자로
대학에 들어 왔다고 치드라도,
하다못해, 아주 부유한 집의 자녀들이,
그냥 간판만 얻으려고 대학을 들어왔다고 치드라도…
대학 자체는 공부를 위해서 있는 곳이다.
그래서 학점과 졸업을 하려면, 그만큼 공부를 해야만 된다!]

알고보면,
미국의 대학 진학률이 비교적 최근에- 1980년 이후에- 와서야 높아졌지…
전에는 사실상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아주 낮았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만 나와도 취직이나 먹고사는 것에는 별지장이 없었고,
더군다나, 미국은,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이기에,
대학을 못 나왔다고 해서 서러움 받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좀 든 미국 사람들 중에서,
대학 나온 사람을 만나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알고보면? 대학 졸업자는 한국에 흔하고 많은 셈이다.

“실컷 공부 좀 해 보고 싶어서… 많이 배워보고 싶어서…
대학에 왔다!” 라는 학생들이 실제로 많고,
우리 대학은 “오직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만 오라!”고,
선전하는 대학들도 많다!

그리고,
미국의 평가 제도는 철저하게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적당히 또는 엉터리로 학점을 주는 일은 있을 수도 없다!

[한국에서 처럼, 선생 또는 교수하고 친하거나,
안면이 있다고 해서, 점수를 후하게 주거나,
졸업을 시키는 예는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한국에서는 그런 부조리가 이미 학교에서 통하기에,
사회와 정치 그리고 나라, 구석 구석, 전체가
부정 부패로 만연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그 촌지(寸志)라는 이름의 ‘뇌물’이,
국민학교에서 부터 성행하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없을 것 같다!]

모든 평가는, 수업태도, 과제물, 시험성적, 발표횟수 등등을
일일이 기록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그것에 따라서 점수를 주어야 하고,
그 평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와 타당한 증거가 있어야만 된다.
즉 학생이나 학부형이 요구하면?
그 증거를 보여 주어야 된다!

만약 말이다,
어떤 학생이, 자기의 노력에 비하여, 부당한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이 들면?
또는 다른 학생에 비하여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의심이 들면?
그 학생은 자기의 점수에 대한 ‘재심사 요구’를 학교 당국에 할 수가 있다.
그러면, 학교 측에서는 그 점수가 타당한 것인지? 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 조사가, 마치, 재판을 하듯이 철저하고 공정하게 하도록 되어 있고…
그 조사의 결과에도 그 학생이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또다른 통로를 통하여, 재조사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되어있다.
제도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대학원의 논문 심사의 경우도…
논문 심사 교수가 부당 하다고 느껴지면?
학생은, 그 교수의 교체를 학교 측에 요구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이와같이, 교수는 학생들을 공정하게 평가 해야만 되듯이…
학생들도 교수를 철저하게 평가하여…
학생들이 평가한 교수의 성적표를 전교생들에게 발표한다!
따라서, 실력이 없거나 학생들에게 성의가 없는 교수는,
그 다음 학기의 계약에서 밀려나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교수가 제 맘대로, 휴강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한 상상 조차도 할 수 없다!

———————————

나는,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의 교수들(그때의 교수들)’을 전혀 존경하지 않고 있다!

(존경하기는 커녕…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절대로 그들을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 하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당시의 교수들’은
하나 같이 전문적인 지식도 형편이 없었고…
책임감 의무감 따위도 전혀 없었고…
더군다나, 강의 하는 날 보다도 휴강 하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존경할 수 없는 이유는,
그 休講(휴강)이라는 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도…
한국의 대학은 아직도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에…
그 나라는… 그런 병폐가 쉽게 고쳐질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자리’ 라는 것이 그렇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으려면?
최소한 그 ‘자리 값’은 해야만 되는 것 아닌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소한 그 자리에 합당한 ‘값어치’ 만큼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이왕 내가 대학 다닐 때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간단하게 나마 짚어볼까?

내가 대학 다닐 때의 한국은 참으로 가난한 나라였기에,
대학의 학비라는 것이, 사실상,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 되었는데…
(그래서… 웬만한 집안에서는, 대학을 보낸다는 것을 엄두도 못낼 때였는데…)

그 비싼 돈 내고, 공부하려고 대학엘 들어갔지,
‘먹고 놀고 대학’을 다닐려고 입학한 것도 아니었건만…
아예, 한 학기 동안에 강의 1-2번 하는둥 마는둥 하였던
그런 엉터리 교수들이 수두룩 하였다.

하긴, 거의 모든 강의가… 강의 하는 것 보다도…
휴강하는 일이 몇 배나 되었을 정도였다.

알고보면, 대학 전체가 그런 식이니…
강의 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런 엉터리 교수들이 주는
평가-점수라는 것에,
어떻게, 객관성이 들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제멋대로 였고… 하다못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교수는,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기의 자식에게,
시험지 채점을 맡기는 교수도 다 있다고 하였으니까…
(실제로, 그런 교수를 아버지로 두었던 사람이,
그 때의 일을, 스스로, 고백해 놓은 글을 읽어 본 적도 다 있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의 이름을 밝히라면, 얼마든지, 밝힐 용의가 있다.

특히, 그 한국에서만 살아온 교수나 강사들,
그리고 그 왜정 시대에 배웠다는 사람들은…
사실상 ‘해도 너무 한다!’ 할 만치, 책임감도 의무감도 없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大學이라는 곳은, 놀고 大學!’
또는 ‘入學만 하면 卒業은 저절로 되는 곳’ 이라는 풍조가,
너무나도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농담같은 이야기지만…
어떤 교수는 자기가 대학 다닐 때의 노트 조각-
다 떨어진 노트 조각-을 가지고 들어와서,
칠판에다 베껴 쓰는데…
노트의 페이지가 떨어져 나가서,
글의 문맥이 맞지 않는 것 조차도 모르고 있는 그런 사람도 다 있었다.
(하긴 그 나라는, 한번 교수 자리에 앉으면?
그런 식으로 세월이나 보내면서 정년 퇴직까지 가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질문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것을- 그 알랑한 일본말로 하면서-
‘내가 일본말로는 알고 있는데… 한국어로는 잘 몰라서…’ 라고,
얼버무리는 경우도 흔했다.

(당연히 우리 세대야 일본말을 모르니,
그 사람의 일본어 대답이 틀리는지 맞는지는 고사하고…
그런 대답도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 글을 읽는 그대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내가 모르겠으나…
그대가,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기 바란다!

“최소한의 의무감이나 책임감을 가지고서,
강의를 진행 하였던 교수라는 사람들이,
과연 몇명이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가?”를, 짚어 보시라!

그리고,
더욱 더 불행한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에는, 그런 엉터리 교수들에 대하여,
‘학생들이 정식으로 항의 할수 있는 제도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에는 학생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점에 대하여,
얼마든지 항의를 할 수 있는 여러 통로와 제도가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학교의 주인은 학생들’ 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등록금에 해당되는 배움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등록금에 해당될 만한 지식을 줄 수 없는 교수라면?
그는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고,
봉급을 공짜로 먹고 있는 사깃꾼일 뿐이다!

나는 학생들이 그 시시한 정치 문제를 가지고,
대학 내에서 데모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들의 등록금의 값어치를 위해서,
보다 알찬 배움을 요구하기 위하여,
항의하는 것은 100% 찬성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내가 볼 때에…
그런 사람들이 교수라고 앉아 있는 나라가 망하지 않고서,
그만큼이나마, 유지되는 것이,
오히려 내 눈에는 기적으로 보일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때가 朴正熙 시절이었는데…
뻑하면? 휴교령을 내려서 대학교의 교문을 닫아 버리니…
도대체, 그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더 이상 언급하기 조차 불쾌한 그러한 기억들로만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한국의 先生들 그리고 그 교수라는 사람들은?
그 하늘 같이 높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져야만 한다!
더군다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
“君師父一體 (군사부일체)” 라는 것도, 빨리 폐기해 버려야 된다!

나는, ‘학교는 배움을 위하여 존재하는 장소’라고 철저히 믿고 있다!
따라서,
선생은 그에 합당한 배움을 줄 의무가 있을 뿐이지,
그 외에 더 이상 뭘 바란단 말인가?

미국의 대학에서는 …
공부와 학문에 대한 것 만큼은,
교수와 학생 간의 전쟁처럼 보인다!

강의 준비는, 학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과 교수가 똑같은 제목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해 와서,
강의실에서 토론으로 시작하여 토론으로 끝내는 것이다!

미국의 학교에서의 숙제라는 것은?
모든 과목이 결국은 모두 다 Report 인 셈이다!

“교과서 속에 있는 문제 몇개 풀어 오라!” 는 식의 숙제가 아니라…
모든 과목이 한결같이 Report를 요구한다.
(초 , 중, 고등, 대학이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학년에 따라서 그 Report의 길이와 형식이 약간 다른 것 뿐이다.)

그 작문이나, Report 나, 논문이라는 것은?
참고 서적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서는 작성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Report 에는 반드시 자기가 읽은,
참고 서적의 이름들을 써놓게 되어있다.
(대학의 경우에는, 최소한 참고 서적을 몇 권 이상 반드시 읽고,
그 서적의 이름들을 첨부하게 되어 있다.)

——————————-

Sophomore 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니…
그만 학교 이야기가 길게 되었는데…

아무튼,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만 입학하게 되어도,
모든 일들을 자기 자신이 알아서 해결해 나가야 되기 때문에,
으레, 신입생은 이것 저것 모르는 것이 많고, 어리벙벙하게 되니,
그들 앞에서 가장 많이 아는 척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Sophomore 가 되니까…
그와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의 별명으로,
“He (She) is a sophomore!” 라는, 표현이 사용되게 된 셈이다.

[Sophomore라는 말의 어원은, 100%의 정설은 아니지만…
대략 ‘Sophom (sophism궤변론, sophist 궤변론자의 古語體) + ore (접미사)’
라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

자아 이쯤에서 오늘의 결론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그 어떤 지식, 그 어떤 진리, 그 어떤 설명,
그 어떤 해석, 그 어떤 지혜 등등도…
모두 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험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삶 자체가 결국은 경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해석도, 자기의 경험과 지식 수준에 따라서, 나올 수 밖에 없다!

비록, 새로 들어가는 것 자체는 진리라고 하드라도…
그 진리가 들어가는 그릇 속이,
이미, 오물로 가득차 있다면?
진리는 그 곳으로 들어 가는 순간에, 그냥 오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오물로 가득찬 항아리에 깨끗한 물을 집어 넣어 보았자…
그 깨끗한 물까지 더러워질 수 밖에 더 있는가!

———————————-

우리들은, 자주, 자기가 다니는 ‘교회 자랑’을 길게 늘어 놓는
예수교도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딱 한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설교만 한번 들어 보시면?
다 된다니까요!”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하지만,
그 말은, 교회의 자랑이 아니고, 결국은,
목사의 자랑 또는 그 목사의 설교 자랑이 되는 것 뿐이지만…

과연?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그 ‘목사의 설교’ 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목사라는 사람의 경험에서 나오는 ‘해석’일 뿐이지 않은가?
그 목사가 기독경에 대한 설명을 하던?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설명을 하던?
자기가 읽어본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모두 다,
그 목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수준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수준은 그가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고.

그런데…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의 감명이라는 것은 또 뭔가?
그것은,
결국은, 서로 서로 같은 수준이기에 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끼리 끼리, 같은 수준끼리만 통하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의 두뇌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의 수준보다 못하거나,
기껏해야 같은 수준까지만 이해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 자기의 지식보다 수준이 높은 것은,
절대로 이해 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목사의 수준과 그 신자의 수준은 똑같은 수준이기에,
그리고 같은 수준의 안목을 가지고 있기에,
결국은 그렇게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것 뿐이다. 알겠는가?

감명이라는 것은?
거울에 반사되는 반사체일 뿐이고, 메아리일 뿐이다!

지금 당장 거울을 들여다 보아라!
그 거울에 비친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결국을 자기의 얼굴이기에…
자기 혼자서만 흡족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 혼자서만 즐겨라!
뭣 때문에, 자기의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까지 강요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겨우 자기 자신의 얼굴이나 보이는,
그런 거울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의 감명이 아무리 깊다고 하드라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거울에 비친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
같은 수준에서 나오는, 같은 수준의 해석이기에,
감명을 받게 되는 것 뿐이다.

1-3 (내 얼굴, 스케치)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무단 복제 사용을 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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