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 호칭 – 스님

2023-01-11, Pinnacle 1-2

2023-01-11, Pinnacle 1-3

중의 호칭 – 스님

~ 李相奉 / 철학박사

한국어에서, 중의 호칭으로 쓰이고 있는
“스님” 이라는 단어는,
漢字(한자) 僧(승)에서 나온 말이다.

그 유래(由來)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이렇다!

절에는, 절의 업무를 주관(主管)하는 중이 있는데,
그를, 住持(주지) 또는 住持僧(주지승)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외에 여러 가지 호칭의 중들이 있다.

[절에는 사찰의 살림을 제대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중이 있으니, 이판승(理判僧), 사판승(事判僧),
사승(師僧), 上座僧(상좌승)도 있다.
하긴 그러한 명칭이야 얼마든지 붙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쓰여지는 말 중에,
즉, 막다른 限界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사용하는 用語에
“이판사판 이다!” 라는 것이 있는데…
이 말은 불교 용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에 대한 것은, 다른 기회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주지승이나 상좌승을 부르게 될 때에,
그냥 “주지승, 상좌승” 이라고만 부를 수가 없기에…
(원래, 한국어에서의 모든 호칭이 그렇듯이…)

거기에다, 님 字를 붙여서…
“주지승 님!” “상좌승 님” 이라고 부르다 보니…
발음상 “주지승 님 — 주지스님 — 주지 스님” 으로 변천이 되어서,
즉, “僧님 — 스님” 으로 되어서,
“스님” 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스님이라는 단어는, “僧(승)+님” 에서 나온 것으로,
전적(全的)으로, 漢字語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그것을, 굳이, 순수한 한글로만 표기를 한다면…
“중+님 = 중님” 이나, 똑같은 의미의 말이 되겠다.

그런데…
李朝 시대 때에는, 崇儒抑佛(숭유억불)이라는 정책에 의하여,
佛敎가 아주 심한 억압과 배척을 받게 되다 보니,
거의 모든 대화 속에서는,
“중놈”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냐? 하면…
옛 시조에도 나오듯이,
“저기 가는 저 중놈 아, 너 가는데 물어보자…” 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다, 일일이, 言及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고도 많은 例文(예문)이 있으니,
그저, 두서 없이, 몇 가지만 적어 놓아보면 이렇다.

“야! 이 양심도 없는 까까머리 중놈아!
하늘에는 하늘 대로 높이가 있고, 물에는 물 대로 깊이가 있다.
高低도 알지 못하고, 깊고 얕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이 당나귀 같은 놈아!”
“이놈, 까까머리 중놈아! 너는…”
“어째, 말투가 까까머리 중놈들하고 똑같수?”
“그는, 帶妻僧(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까까중놈의 아들’이라는
놀림을, 아주 어려서 부터 듣고 자랐다.”

[까까중이라는 것은
“까까머리를 한 중- 머리를 박박깎은 중”이라는 소리다.]

이런 식으로…
“중놈” “까까중놈” 이라는 단어가 판을 쳤으니…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중+님 = 중님”이라는 단어가,
발을 붙이고, 보편화 되어서 사용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승님 — 스님” 으로 된 단어가,
널리 쓰여지게 된 것인데…
그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중”은 한국말 이라고 간주하고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或者(혹자)는, “중”을 한국말이 아니고,
漢字 “衆”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즉, 석가모니가 大衆을 모아 놓고서 자주 說法을 하다 보니…
그곳에 모인 大衆- 衆(중)-이
僧侶(승려)를 뜻하는 말로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중이 漢字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에,
한국 사람들은, 원래, 순수한 한글이나 한국말 보다는,
漢字를, 높이 보는 경향이 많기에…
“늙은이” 라고 하면,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한 늙은이들이 싫어 하기에,
“老人” 이라는 漢字를 사용하듯이…
아마도, 중들도, 중이라고 부르면 싫어하기에,
僧님(스님)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여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
내가,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덧 붙여 놓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즈음의 세상에서도,
한국에서는 예수교도라고 하는 자들이,
중(僧)에게 ‘불신지옥!’ 이라고, 대놓고 외치고 있다!고, 하고,
‘절에다 불을 지르고 있다!’고, 하던데…
그러한 식의 宗敎觀(종교관)이나 信仰心(신앙심)을,
나는, 認定 하여 줄 수도 없고, 容納 하여 줄 수도 없다!
그것은, 宗敎觀의 問題가 아니라… 人間性의 問題다!”

~Sang Bong Lee, Ph.D.,
Dr. Sang Lee’s Iconoclasm,
Sang’s Discovering Your Nature,
Dr. Sang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an effable and ineff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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