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와 촉석루

역사기행논개와촉석루

거룩한분노는
종교보다도깊고,
불붙는정열은
사랑보다도강하다.

아!강낭콩꽃보다도더푸른
그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더붉은
그마음흘러라.
–변영로의論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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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된사람들은학창시절국어교과서에서읽었던시의한구절이다.이시는’논개의절개와조국에대한사랑’을노래하고있는데지금진주성에가면남강을내려다보며서있는변영로시비(詩碑)에새겨져있다.

진주는촉석성이라는옛이름의진주읍성에서비롯된곳이다.진주성은’변한의고도’진주의한가운데자리잡고있는옛성으로이곳사람들의휴식처와정신적인고향으로큰몫을하고있다.

진주성에서가장유명한곳은촉석루이다.촉석루는백제시대에만들어진것으로알려지고있지만확실한역사적기록으로는고려말에축조된것으로전해진다.고려말에돌로튼튼하게진주성을쌓을때에그성의동서남북에누대네채를만들었는데남쪽에세운남장대가바로촉석루이다.촉석루는그후여러차례병란으로불타고다시지어지고했는데6.25때불탄것을60년에재건한것이오늘의모습이다.

진주를찾은많은문인들이빼놓지않고찾는곳이바로촉석루이다.일제때인1920년경촉석루를찾아’논개’라는시를지었는데논개의사당은촉석루바로곁에서의암을내려다보고있다.

의암주위에는물이깊을뿐만아니라소용돌이까지치고있어위험스런바위라는’위암’이라는이름이붙어있었다고한다.그런데이바위에서논개가열손가락마다반지를끼고왜장을빠져나갈수없게꼭껴안고물에뛰어들어,죽음으로의를펼쳤다는의미의’의암’으로바꾸어부르게되었다고전해진다.

의암의주인공인논개는뭇사람에게기생으로알려져있지만사실은당시경상우도병마절도사최경회의후실이다.

논개는선조7년(1574)9월3일지금의전북장수군임내면주촌부락에서부친주달문과모친밀양박씨의외동딸로태어났다.그러나일찌기부모를여의고숙부주달무에게가있었는데숙부가임내면의김풍헌에게민며느리로보내게된다.그러자논개는그곳에서도망쳤다가붙잡혀장수현감최경회의재판을받게되는데다행이무죄방면되었다.하지만의지할곳없는논개는최현감부인의주선으로최현감후실로들어앉게되었다.

그후선조25년(1592)4월에임진왜란이일어나자최현감은의병을모집해서왜군을무찌르는전공을세운다.이어1593년4월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승진되어논개와함께진주로부임하게된다.그러나1593년6월29일진주성이왜군에게함락되자최절도사는김천일고종우장군과함께남강에투신수절하였다.

이에논개는국치의설욕과부군의원수를갚을기회를엿보던중,그해7월7일촉석루에서벌어진왜군의승전잔치에기생을가장하고참석하여주흥에도취된왜장게다니무라로꾸스케(毛谷村六助)를남강가의바위로유인해서그의허리를껴안고함께물속에몸을던져순절하였다.당시논개의나이는방년19세였다.

그후조정에서도논개의순절을높이찬양하여의암이라는사호(祠號)를내렸고진주촉석루곁에는논개사당을지어그넋을위로추모하게되었다.또한1954년논개의생장지인전라북도장수에논개의사당을세우고의암사라이름지었다.

지금은역사의한페이지로정리되어있지만’양귀비꽃보다도더붉은거룩한분노’가서려있는진주땅남강가의암에가면새삼스레’절개와조국애’의아름다움을느낄수있다

논개가왜장을끌어안고투신한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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