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철종2∼고종32))

어느외국인이찍은사진인데명성황후에대한진위논란이있음.

조선고종의비.성은민씨(閔氏).본관은여흥(驪興).경기도여주출생.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치록(致祿)의딸이다.

1866년(고종3)흥선대원군의부인인부대부인(府大夫人)민씨의추천으로왕비가되었다.몇년뒤부터왕실정치에관여하여궁녀이씨의몸에서태어난왕자완화군(完和君)에대한흥선대원군의편애와세자책봉문제로대원군과정치적대립이시작되었다.1873년(고종10)대원군의반대파와결탁하여최익현(崔益鉉)의탄핵상소를계기로대원군을하야시키고,고종의친정(親政)을선포하였다.

대원군실각후민씨척족을앞세워정권을장악,고종을움직여1876년강화도조약을체결하고개화정책을시행했다.1882년(고종19)위정척사파와대원군세력이민씨척족의군제개편및홀대에불만을품은구식군대와결탁하여임오군란을일으키자,장호원에있는민응식(閔應植)의집에피신하여고종과비밀리에연락을취하며,청나라에군대를요청하고대원군을납치하게하였다.

이때부터친청사대(親淸事大)로흐르게되어개화파가불만을품고1884년(고종21)갑신정변을일으켰으나,곧청나라의도움으로다시정권을장악하였다.

1885년거문도사건이일어나자묄렌도르프를통해영국과협상하면서한편으로러시아와도접촉하였다.이에일본과청나라는러시아를견제하고자대원군을입국시켜명성황후세력과정권싸움을벌이도록하였다.1894년청일전쟁에서승리한일본이조선정계에압력을가해오자명성황후는친러시아적인태도를보이며일본에대항했다.

1895년(고종32)10월8일일본공사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일본의한반도침략에저항하는명성황후와그세력을없애고자일부친일정치인과결탁,일본의군대와정치낭인(깡패)으로하여금궁궐을습격해명성황후를시해하게한을미사변을일으켰다.명성황후는일본낭인들에의해살해되고궁궐밖에서시체가불살라지는불행한최후를맞았다.곧이어친일정권이폐비시켰으나곧복위되었고,1897년대한제국으로국호가바뀌자<명성>이라는시호가내려졌다.

1895년에지금의경기도구리시숙릉(肅陵)에묻혔다가,1897년청량리홍릉(洪陵)으로이장되었다.1919년고종이죽은뒤다시지금의남양주시금곡동홍릉으로이장되었다.

명성황후초상화

명성황후가일본측폭도들에의해시해된장소가지금까지알려진대로침전안이아니라침전밖마당이었다는내용의보고서가공개됐다.을미사변석달후작성된일본측보고서에담겨진내용으로기존의학설과는다른것이어서주목을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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