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
조선중종대개성의기생,시조시인.
그녀의정확한생존연대는알길이없다.다만그녀가1520년대에나서1560년대쯤에죽었을것이라는것만황진이와사귄사람들의일화로부터추측할수있다.황진이의출자(出自)가황진사의서녀라고전해져있지만,그녀는개성의아전진(陳)가에서기녀의몸을빌어태어났다는것과그녀의기명이명월(明月)인것만은종실벽계수(碧溪守)와의수응에서확실한것같다.
박연폭포·서경덕과함께송도3절(松都三絶)이라일컫는다.재색을겸비한조선조최고의명기이다.어디를가든선비들과어깨를겨누고대화하며뛰어난한시나시조를지었다.가곡에도뛰어나그음색이청아했으며,당대가야금의묘수(妙手)라불리는이들까지도그녀를선녀(仙女)라고칭찬했다.황진사의서녀라고도하고맹인의딸이라고도하는데,일찍이개성의관기가되었다.15세때이웃의한서생이황진이를사모하다병으로죽게되었는데,영구가황진이의집앞에당도했을때말이슬피울며나가지않았다.황진이가속적삼으로관을덮어주자말이움직여나갔다.이일이있은후기생이되었다는야담이전한다.
기생이된후뛰어난미모,활달한성격,청아한소리,예술적재능으로인해명기로이름을날렸다.화장을안하고머리만빗을따름이었으나광채가나다른기생들을압도했다.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회갑연에참석해노래를불러모든이의칭송을들었고다른기생들과송공소실들의질투를한몸에받았으며,외국사신들로부터천하절색이라는감탄을받았다.
성격이활달해남자와같았으며,협객의풍을지녀남성에게굴복하지않고오히려남성들을굴복시켰다.30년간벽만바라보고수도에정진하는지족선사(知足禪師)를찾아가미색으로시험해결국굴복시키고말았다는일화는유명하다.
시정의돈만아는사람들이천금을가지고유혹해도돌아보지않았으나,서경덕이처사(處士)로학문이높다는말을듣고찾아가시험했으나그의높은인격에탄복하여평생서경덕을사모했다.거문고와술·안주를가지고자주화담정사를방문해담론하며스승으로섬겼다.종실(宗室)벽계수가황진이를만나보기를원했으나황진이는명사가아니면만나주지않아친구이달에게의논했다.
이달은"진이의집을지나누(樓)에올라술을마시고한곡을타면진이가곁에와앉을것이다.그때본체만체하고일어나말을타고가면진이가따라올것이나다리를지나도록돌아보지말라"하고일렀다.벽계수는그의말대로한곡을타고다리로향했다.황진이가이때"청산리벽계수야수이감을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다시오기어려웨라/명월이만공산(滿空山)하니쉬어간들어떠리"라는시조를읊었다.이것을들은벽계수는다리목에이르러뒤를돌아보다말에서떨어졌다.황진이는웃으며"명사가아니라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하며돌아가버렸다고한다.
소세양이황진이의소문을듣고"나는30일만같이살면능히헤어질수있으며추호도미련을갖지않겠다"라고장담했다.그러나황진이와만나30일을살고이별하는날황진이가작별의한시<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지어주자감동하여애초의장담을꺾고다시머물렀다고한다.명창이사종과는그의집에서3년,자기집에서3년,모두6년을같이살고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명산대첩을두루찾아다니기도해재상의아들인이생과금강산을유람할때는절에서걸식하거나몸을팔아식량을얻기도했다고한다.죽을때곡을하지말고고악(鼓樂)으로전송해달라,산에묻지말고큰길에묻어달라,관도쓰지말고동문밖에시체를버려뭇버러지의밥이되게하여천하여자들의경계를삼게하라는등의유언을했다는야담도전한다.
임제가평안도사가되어부임하는도중황진이의무덤에제사를지내면서지었다는"청초우거진골에…"로시작되는시조가전한다.
그녀는"동짓달기나긴밤을…"로시작하는시조를포함해모두8수가량의시조를남겼고<별김경원別金慶元>·<영반월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박연朴淵>·<송도松都>등의한시를남겼다.<식소록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松都紀異>·<금계필담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東國詩話彙成>·<중경지中京誌>·<조야휘언朝野彙言>등의문헌에황진이에관한일화가실려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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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시조
산(山)은옛산(山)이로되물은옛물아니로다
주야(晝夜)로흐르니옛물이있을소냐
인걸(人傑)도물과같도다가고아니오노매라
동짓(冬至)달기나긴밤을한허리를베어내어
춘풍(春風)이불아래서리서리넣었다가
어른님오신날밤이어든구비구비펴리라
청산리(靑山裏)벽계수(碧溪水)야수이감을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돌아오기어려오니
명월(明月)이만공산(滿空山)하니쉬어간들어떠리
청산(靑山)은내뜻이오녹수(綠水)는님의정(情)이
녹수흘러간들청산이야변(變)할손가
녹수(綠水)도청산(靑山)을못잊어우러예어가는고
내언제무신(無信)하여님을언제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온뜻이전혀없네
추풍(秋風)에지는잎소리야낸들어이하리오
어저내일이여그릴줄을모르던가
이시랴하더면가랴마는제구태여보내고
그리는정(情)은나도몰라하노라.
실제의인물을모델로했을것같은신윤복의뛰어난묘사력을보여주는작품.
혜원신윤복작’황진이’
서경덕徐敬德(1489-1546)
조선중기의유학자·주기론(主氣論)의선구자.
본관당성(唐城).자가구(可久).호화담(花潭)·복재(復齋).시호문강(文康).부위(副尉)서호번(徐好蕃)의아들.화담은그가송도의화담에거주했으므로사람들이존경하여부른것이다.송도(松都:지금의개성)화정리(禾井里)에서태어났다.그의집안은양반에속했으나할아버지와아버지가무반계통의하급관리를지냈을뿐,남의땅을부쳐먹을정도로형편이어려웠다.18세에<대학>을읽다가격물치지(格物致知)장에이르러"학문을하면서사물의이치를파고들지않는다면글을읽어어디에쓰겠는가"라고하여,독서보다격물이우선임을깨달아침식을잊을정도로그이치를연구하는데몰두했다.
1519년조광조에의해실시된현량과에으뜸으로천거되었으나사퇴하고화담에서재를지어연구를계속했다.1522년다시속리산·지리산등명승지를구경하고,기행시몇편을남겼다.그는당시많은선비들이사화로참화를당하는것을보았기때문에과거에뜻을두지않았다.1531년어머니의명으로생원시에응시,합격했으나벼슬길에는나가지않았다.1540년김안국(金安國)등에의해조정에추천되고,1544년후릉참봉에제수되었으나사양하고계속화담에머물면서성리학연구에전력했다.
조식(曺植)·성운(成運)등당대의처사(處士)들과지리산·속리산등을유람하면서교유하였으며,학문경향은궁리(窮理)와격치(格致)를중시하였으며,선유의학설을널리흡수하고자신의견해는간략히개진하였다.또한주돈이(周敦燎)·소옹(邵雍)·장재(張載)등북송(北宋)성리학자의학문에많은관심을보였다.
단편논저로는<원리설(原理說)><이기설(理氣說)><태허설(太虛說)><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등네편이있는데,이들논저에는‘이(理)’보다는‘기(氣)’를중시하는주기철학의입장이정리되어있다.<태허설>에서는우주의근본원리를태허또는선천(先天)이라하고태허에서생성발전된만상(萬象)을후천(後天)이라하였으며,<귀신사생론>에서는인간의죽음도우주의기에환원된다는사생일여(死生一如)를주장하여기의불멸성을강조하고,불교의인간생명이적멸한다는논리를배격하였다.대표적문인으로는허엽(許曄)·박순(朴淳)·민순(閔純)·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한백겸(韓百謙)·이지함(李之函)등이있으며,그의학문은남북분당기에북인의사상을형성하는데큰영향을주었다.
황진이·박연폭포와함께개성을대표한송도3절(松都三絶)로지칭되기도하며,황진이의유혹을물리친일화는시조작품으로도전해질만큼유명하다.노장사상으로대표되는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관심을보여도가의행적을기록한<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그의도가적인성향이소개되었다.그의학풍은조선전기의사상계의흐름이주자성리학일색만이아니었던분위기를보여주며,그의문인들중에서양명학자나노장사상에경도된인물이나타나는것은주목할만하다.한편,북한에서는그의주기철학을유물론의원류로평가하여그의철학을높이평가한다.개성의숭양서원(崧陽書院)과화곡서원(花谷書院)에제향되었으며,문집으로는<화담집(花潭集)>이있다.
*봄이여내게로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