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가.4·19혁명의배경

1945년,35년동안의일제의억압과질곡에서벗어난우리민족은광복의기쁨을누리기도전에강대국들에의해남북분단의아픔을겪었다.
1948년8월15일,남한만의단독선거로대한민국정부가수립되었으나,2년도채되지않은1950년,우리민족최대의비극인동족상잔의피비린내나는6·25전쟁을겪어야했으며,3년에걸친전쟁으로우리국토는완전히폐허가되고말았다.
수많은전쟁고아들이생겨났으며,우리경제는자생력을잃고외국의원조에의존함으로써물가는자꾸오르기만하였고,사람들은일자리를찿지못해거리를배회했다.
그러나,국가를재건하고국가경제를일으켜야할이승만자유당정권은자신들의장기집권을꾀하며부산정치파동,사사오입개헌,반대세력에대한폭력등온갖정치적부정과탄압을일삼았다.
이승만정부에실망한국민들이1956년민의원선거에서야당인민주당에게압도적인지지를보내게되자이에불안해진자유당은1960년3월15일에있을정부통령선거를대비해선거일년전부터대대적인부정선거를획책했다.

나.대구2·28학생의거

1960년2월28일,대구에서개최될민주당선거유세에학생들이참석하지못하도록일요일임에도불구하고학생들을등교시켜영화관람,토끼사냥등에동원하자대구지역고교생들은부정선거를규탄하는거센항의시위를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불의와부정선거에대한최초의항거로4·19혁명의***점이되었다.

다.3·15부정선거

1960년3월15일,마침내정·부통령선거날이밝았다.
이날은장기집권을꿈꾸는이승만과이승만의갑작스런유고시뒤를이을자유당부통령후보이기붕의예정된승리의날이었다.
3·15선거는사상유례없는추악하고불법적인부정선거로얼룩졌다.

첫째,세사람또는다섯사람씩짝지어기표하고자유당원에게검사받는3인조,5인조공개투표

둘째,투표소주변에자유당완장부대를동원해민주당지지자에게위협을주는완장부대등장

셋째,있지도않은사람을유권자로둔갑시켜자유당에투표하게하는유령유권자조작

넷째,총유권자의40%에달하는자유당표를미리투표함에넣어두는4할사전투표등부정과폭력이난무했다.

라.마산3·15의거

민주당마산지부의선거무효선언과함께시작된부정선거규탄시위가전국으로확산되자,이승만정부는무차별진압에나섰고마산에서는경찰의사격으로학생과시민이쓰러졌다.
무고한시민,학생의죽음을공산당의책동으로무마하려고애쓰던이무렵,마산시중앙부두앞바다에눈에최루탄이박힌소년의시체한구가떠올랐다.
3월15일부정선거항의시위에참가했던김주열군이실종20여일만에참혹한시체로발견된것이다.
분노한마산시민들은격렬한시위를벌였다.그러나이승만정권은진실규명은외면한채무고한시민들을연행,고문하였고,이에자유당의만행을규탄하는시위가전국에서일어났다.

마.4·19혁명의***

4월18일,국회의사당앞에서구속된동료학우들의석방과학원자유를요구하며,평화적시위를벌인후귀가하던고려대생들이청계천4가를지날때경찰과모의한반공청년단이라는정치깡패들이무차별테러를가해수십명의학생이부상당하는사건이발생했다.
학생들의평화시위마저폭력으로진압한정권에대해국민들의분노가마침내폭발했다.이고대생피습사건을계기로자유당정권은걷잡을수없는국민의저항에직면하게된다.

바.4·19혁명

"피의화요일"이라불리우는1960년4월19일,학생들은이른아침부터선언문을낭독하고거리로뛰쳐나왔다.국회의사당에모인학생시위대열은경무대방향으로치닫기시작했다.
부정선거규탄과학원의자유를요구했던시위가경찰의무자비한탄압으로혁명의대열로바뀌고있었다.젊은학생들은전우와애국가를부르며앞으로달려나갔다.
시민들도학생들의대열에합류했고,서울시내는온통민주를외치는시위대열로뒤덮혔다.이무렵시위대의숫자는이미10만명을넘고있었다.
경무대로향하는학생들과이를저지하려는경찰과의공방은치열했다.최루탄과공포사격으로저지하던경찰의1차저지선은민주신념에불타는학생과시민들을막을수가없었다.
시위대는경찰의최후저지선인경무대를향해달려갔다.소방차를앞세운시위대와경찰의간격이10여미터로좁혀졌을때,경찰의총구가일제히불을뿜었다.경무대사격을시작으로서울시내곳곳에서시위대를향해무차별사격이가해져꽃다운젊은학생과시민들이수없이희생되었다.
분노한시민들은반공청년단본부와왜곡보도를일삼았던신문사를불태웠으며,시위를진압하기위해출동한소방차를뺏고경찰관서를습격하는등항의시위를전개했다.
혁명의불길이걷잡을수없이번져가자,자유당정권은계엄령을선포하며사건무마에온힘을기울였지만,만심은보다근본적인개혁을요구하고있었다.

사.대학교수단의시국선언과전국민의궐기

4월25일,독재정권의종말을결정짓는시위가일어났다.제자들의희생에가슴아파하던대학교수들이시민과학생들의호위를받으며이승만대통령의하야를요구하는시위를전개한것이다.
온국민이궐기했다.부산과마산에서는할머니,할아버지,노동자,농민,구두닦이까지민주를향한외침에참가했다.
민주주의를바라는진정한염원이전국에물결치고있었다.4·19혁명의승리는희생을아끼지않은이땅의모든이들이붉은선혈위에서꽃망울을터뜨린소중한산물이었다.

아.이승만대통령하야및자유당정권종말

4월26일,서울시내엔삼엄한경계태세가취해졌고시위대의규모도엄청나게불어났다.교수단시위이후국민들의요구는이승만의하야로모아졌다.4·19혁명때경찰의발포로친구를잃은초등학교학생들도어깨동무를하고시위에참여했다.
경무대를지키던계엄군은실탄을장전한상태였지만,처음부터엄정중립의입장을지켜군은더이상국민의희생을원하지않았다.
사태수습이불가능함을알아차린이승만대통령은마침내하야성명을발표했다.마침내불의에항거한민주이념이승리한것이다.
새로운민주시대를염원하는환호와만세소리로전국이들끓었다.
이승만대통령은이화장으로거처를옮겼다가부통령이기붕일가가스스로목숨을끊자미국으로망명하였다.이승만의하야후허정내각수반이과도정부를이끌었고,학생들은파괴된질서를회복하는데힘썼다.그리하여1960년8월,의원내각제의장면내각이새롭게출범하게되었다.

자료출처:Yahoo.

4.19정신계승을강조하며,45주년을맞이하여학생들이현수막을들고거리행진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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